[경일칼럼]북소리
[경일칼럼]북소리
  • 경남일보
  • 승인 2024.01.15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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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김은영 경남도립남해대학 교수


둥둥둥, 북이 울린다. 영화 ‘노량’의 도입부는 먼 북소리로 시작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거친 숨소리로 이어진다. 그는 측실과 아들, 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으로부터의 철군을 명하고 숨을 거둔다.

‘노량’은 히데요시가 시작한 7년간의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그러기에 영화는 도입부에서 히데요시의 죽음을, 이어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철군 준비를,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조명연합군 내 갈등을 지루하다 싶게 시시콜콜히 보여준다. 이미 끝난 전쟁이니 그만 퇴로를 열어주자는 진린과 “결코 이 전쟁을 이렇게 끝내서는 아니 된다”는 이순신의 주장이 팽팽히 부딪치면서 영화는 긴 해상전투 장면으로 이어진다.

영화의 도입 시퀀스에는 반드시 강력한 함의가 숨어 있다. 전편의 전개 방향과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북소리로 시작해서 북소리로 끝나는 영화 ‘노량’의 메시지는, 단연 북소리의 메타포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마디로 ‘노량’은 영웅의 죽음에 바치는 북소리의 조사(弔詞)다.

필자는 이 영화를 남해 보물섬 시네마에서 관람했다. 마침 인근 고교의 단체관람 덕분에 ‘노량’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어떨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 옆자리 학생이 일어나며 친구에게 말했다. “야, 너 울었지? 쿨쿨 자다가 전쟁 장면부터 일어나서 보더니, 이순신 장군 돌아가실 때는 막 찔끔대더라.” 더하고 덜할 것 없는 정직한 평이었다.

그랬다. ‘노량’의 전반부는 지루했지만, 이어진 해상전투 신은 박진감 넘쳤고, 장군의 최후는 웅장하고 비장했다. 앞서 ‘명량’과 ‘한산’을 제작했던 김한민 감독이 ‘역사가 스포일러’인 이순신 장군의 최후를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는데, 압도적인 북소리로 마무리 지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필자의 심장도 덩달아 쿵쿵 울리는 듯했다. (죽은 부하 장수들과 아들 면의 환영을 보는 장면이랄지, 엔딩 크레딧 후 뜬금없는 광해군의 등장은 따분한 사족이었지만 말이다.)

노량해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이순신은 직접 큰북을 울리며 아군을 독려한다. 어디선가 두 발의 총성이 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가 아들 회가 북채를 이어 쥐면서 다시 북소리가 이어진다. 아군은 이순신의 죽음을 모른 채 적을 섬멸하지만, 적장 시마즈는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치열했던 전쟁이 끝나고 ‘노량’의 모든 전선에서 장군의 최후를 알리는 북소리가 길게 울려 퍼질 때, 필자는 문득 17세기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던이 남긴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러니 저 조종(弔鐘)이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알려고 하지 마라/ 그것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므로.” 바다 위 잔해와 시체 사이로 울려 퍼지던 북소리가 결국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임을 알 것 같았다.

혹자는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당시 조정과 임금의 정치적 압박에 의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김한민 감독은 그것을 마지막 쿠키 영상에 등장하는 광해의 입을 빌려 전한다. 북쪽의 대장별이 대낮에도 밝은 이유는 “전하지 못한 말이 아직 남았거나, 행하지 못한 일이 아직 남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겠냐고.

임란 후의 정치적 난맥상 못지않게 답답하고 화나는 소식을 근래 너무 자주 접하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맞나 싶게 어이없는 죽음과 폭력적인 정치 해프닝, 혼란한 국제정세 등. 이런 뉴스를 목도하면서 오늘날의 우리는 ‘노량’의 북소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다만 그의 죽음에 대한 애달픈 부고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곰곰 생각게 된다. 우리가 지금 뭔가 제대로 하지 않으면 북소리도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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