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모순과 역설의 말
[경일춘추]모순과 역설의 말
  • 경남일보
  • 승인 2024.01.3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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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요 진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정재요 진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어릴 적부터 필자는 ‘소리 없는 아우성’, ‘텅 빈 충만’, ‘뜨거운 얼음’과 같은 모순과 역설의 말을 좋아했다. 왠지 이런 말은 심오한 성취를 이룬 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진리의 언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가수 이승철이 부른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라는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도, 곡 자체가 지닌 아름다운 멜로디·보컬 라인과 함께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라는 역설적인 가사가 주는 벅찬 감동 때문이었다. 슬퍼도 행복하다니, 이건 분명 높은 차원의 경지일거야!

비슷한 맥락에서, 노장철학이나 불가의 언어를 통해서도 모순과 역설의 말이 전해주는 고유한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生死一如), ‘일 없음이 나의 일’(無事猶成事)과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필자는 스스로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찍이 경허선사(鏡虛禪師)께서 일갈하신 바 있는 “일 없음이 곧 나의 일”이라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종종 차용하곤 하지만, 일 하기 싫음에 대한 자기변명적인 도구로 사용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울 만큼 ‘일 없음이 나의 일’이라는 말은 고매한 깨달음의 경지를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부처님도 49년 동안 팔만 사천의 법문을 설하셨지만, 정작 열반에 드실 즈음에는 “나는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고 했다. 역시 모순과 역설의 말은 불완전한 인간과, 그러한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가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 취해야만 하는 극적인 표상형식인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도 모순과 역설을 담은 말이 담론이나 테제(thesis 명제)의 형식으로 종종 등장하곤 한다. 이를테면 ‘비동시성의 동시성’, ‘비상사태의 일상화’,(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난민·수용자 등에 대한 묘사로서) ‘포함된 배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내적 결탁’과 같은 말이 그것인데,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 은폐돼 있는 정치권력의 민낯과 열악한 인간의 조건이 폭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비상사태의 일상화’라는 말을 통해서는 선거철 한국정치에서 숱하게 목격되는 비상대책위원회의 식상함과 진부함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가? 일견 쓸모없어 보이는 모순과 역설의 말이야말로 가장 쓸모 있는 진리의 매개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모순과 역설의 말에 감동받을 준비가 돼있다. 관련해, 정년을 맞이하게 될 먼 미래의 퇴임사를 한 번 상상해 본다. “지난 26년 동안 예비 초등 교사들을 가르쳐왔지만, 나는 하나도 가르친 바 없다.” 내 생애 과연 이런 멋들어진 모순과 역설의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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