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영현면 84세 서보명 할머니 60년 일기에 담긴 인생
고성 영현면 84세 서보명 할머니 60년 일기에 담긴 인생
  • 이웅재
  • 승인 2024.02.18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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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영현면 84세 서보명 할머니
23살부터 써내려간 일기 화제
시집살이부터 남편 사별까지
역사책 된 소소한 일상 기록

23세에 시집와서 84세가 될 때까지 60여년 동안 일기쓰기에 진심인 할머니가 있어 화제다.

고성군 영현면에 살고 있는 1940년생 서보명 할머니는 23세 되던 1962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때, 등잔불 밑에서 펜에 잉크를 묻혀가면서 일기를 쓴 덕분에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연, 월, 일, 날씨가 정확히 기록돼 있는 서 할머니의 일기는 학생용 공책 수십권에 달한다.

초창기 할머니 일기에는 젊은 처자가 시집와서 어려운 시절을 살아내야만 했던 한(恨)이 담겨있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일상에 대한 고백으로 진화한다. 시부모 모시기와 친척 방문, 이웃 마실 등에 얽힌 사연은 물론 우물에서 빨래한 이야기, 눈물로 아궁이에 불을 지핀 이야기 등등 모두가 가난했던 당시 우리네 일상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으면 잊히고 말았을 일상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서 할머니 일기의 압권은 임종한 남편을 보내면서 적은 글이다. 서 할머니의 남편 고(故) 정복수 씨는 2012년 2월 20일 작고했는데, 23일 발인을 앞두고 화장실에서 작별의 마음으로 장문의 글을 적었단다.

서 할머니는 “결혼한 지 50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며 “‘여보’, ‘당신’, 평생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말을 발인 1시간 전 화장실에서 전화번호 수첩에 산문형식으로 적었다”고 회상했다. 

이를 본 상조회사 직원이 ‘남편을 보내는 애절한 마음과 남은 이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각오 등 사별의 감정을 너무 잘 표현한 글’이라면서 코팅해서 줬다. 

“여보 당신, 당신이라고 부르는 소리도 처음이고 마지막 부르는 당신이예요! 여보 당신 이제는 헤어져야 하네요! 당신과 만난 지도 만 50년 된 오늘날까지 당신 너무 수고했어요. 우리 가족 위해 열심히 산 당신…, 오늘이 슬프고 오늘이 미워요…,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 항상 아들 딸 손자 손녀 사랑하고…, 당신은 오늘부터 머나먼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계십시오! 아내로서 마지막 부탁이에요!

음력 2012년 2월23일 새벽 5시50분 아내

서보명 씀.”


할머니는 당시 국민학교에서 한글만 배웠다. 그런데 일기는 국한문 혼용이다. 오빠에게 배웠다는 서 할머니의 기억력은 아직도 여전하다.

“이웃들과의 몫 돈 나누기나 추렴할 때 계산을 도맡아 한다”는 서 할머니는 낭낭한 목소리로 구구단을 외우면서 기억력을 뽐냈다. “여력이 될 때까지 일기를 쓰겠다”는 서 할머니의 당당함에서 대한민국 노익장의 품격이 느껴졌다.

이웅재기자

서보명 할머니가 남편을 떠나 보내면서 적었던 글을 읽고 있다.

 

1962년 12월 15일부터 시작한 서보명 할머니의 첫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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