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예술인을 만나다]박지선 일러스트레이터
[청년 예술인을 만나다]박지선 일러스트레이터
  • 백지영
  • 승인 2024.02.25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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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하이 할머니 될 때까지 그림 그리려고요"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정착한 낯선 도시 진주. 갓 태어난 아이와 남편 외에는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없는 동네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큰 모험이었다.

마음 붙일 곳 하나 없이, 종일 집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던 초보 엄마는 어느날 펜을 들었다. 아이를 낳은 후 계속해 마음속에 맴돌던 생각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를 실천에 옮겨보자 싶었다. 봉긋봉긋한 아이의 볼, 맑고 투명한 눈망울과 속눈썹을 종이에 담았다.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나날, 아이를 겨우 재우고 쪽잠을 자려고 보면 다시 아이가 눈에 밟혔다. 왼팔로 잠든 아이를 안은 채 오른손으로 그 모습을 그려 나갔다. 이전까지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아이를 만난 덕에 겪게 된 일상들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아이를 담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육아 스트레스를 없애주는 소소한 낙이었다.

그림에 위안을 얻는 모습을 본 남편이 아이패드를 선물하고부터는 종이가 아닌 태블릿PC를 도화지로 삼았다. 종이에 그릴 때와는 달리 마음에 안 들면 지우고, 색깔도 여러 개 입혀보며 마음에 드는 색을 찾을 수 있어 좋았다. 더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이 그림을 나 혼자만 보며 집구석에서 썩히지 말고 남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별 생각 없이 네이버 그라폴리오(창작자 지원 플랫폼)에 작품을 올렸는데 덜컥 네이버 메인 페이지에 소개돼 주목을 받았다.

내가 즐거워서 그린 그림을 남들도 좋아해 준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동생 권유로 인스타그램 계정도 만들었는데, 이곳을 통해 이듬해부터 일러스트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력 단절을 딛고 진주에서 ‘소소하이’라는 이름으로 5년 차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박지선(39)씨의 이야기다.

“결혼 전에는 건설사에서 팸플릿이나 책자 등을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말은 디자인이지만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죠. 학창 시절 잠시 입시 미술을 했던 것을 제외하곤 이후 그림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는데, 아이를 만나고 새 인생을 살게 된 거죠.”

새 꿈을 목표로 육아 일러스트를 꾸준히 연재하고 공모전을 하나둘 휩쓴 결과, 이제는 그림책도 내고 유명 기업의 일러스트도 맡는 등 프로 일러스트레이터가 됐다.

박 씨는 지난 12월 진주 상평동 나무88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순간들’을 열었다. 첫눈을 기다리는 듯 설레는 마음으로 겨울 동안 그린 작품들을 모은, 연말 선물 같은 느낌의 전시회였다.

사실 이번 전시는 여러 차례의 망설임 끝에 간신히 성사됐다. 시작은 아이가 전시 보는 것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함께 가볼 만한 근처 갤러리를 찾아보던 중 나무88갤러리를 발견하면서부터다.

‘예술가의 초창기 가장 날 것일 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 신진 작가의 첫 전시를 지원합니다.’ 갤러리 소개 글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림 공부와 포트폴리오 정리, 출간 책 홍보 등 해야 할 일은 산더미지만 다 제쳐두고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해보기로 결심했다.

큰마음 먹고 갤러리 문을 두드렸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망설임이 찾아왔다. 작은 카페에서 여는 일러스트 전시 정도를 생각해왔던 자신에게 너무 큰 공간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정통 그림 코스를 밟아온 이들과 달리 사실상 독학으로 공부한 것과 다름없는지라 ‘제 그림으로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주에 인맥도 없다 보니 아무도 오지 않을 것만 같았죠.”

몇 번이나 주저하는 그를 잡아 세운 건 김은옥 나무88갤러리 관장이었다. 그가 새로운 작품을 가지고 찾아갈 때마다 좋아해 주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냈다. 2년 전 서울 인사동에 열리는 단체전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지만 당시 일이 많고 아이도 어려 고사했던 걸 오래도록 후회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시작한 전시는 관람객 요청에 전시 기간을 보름에서 한 달로 연장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작품도 여러 점 팔렸다. ‘우리 손녀 생각나서’, ‘우리 딸 방에 갖다 놓으려고’, ‘내 어린 시절 생각나서’라고들 했다. 팔릴 거라는 기대를 하지도 않았던 터라 원가 수준으로 작품료를 책정하긴 했지만, 누군가의 집에 내 그림이 걸리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특히 인상적인 구매자는 아이가 졸업한 유치원 관계자였다.

“아이 유치원 음악회 때 코로나로 보러갈 수가 없으니 상상으로 ‘유치원 작은 음악회’라는 그림을 그렸어요. 이 그림을 유치원 벽에 걸고 싶다며 사가시더라고요. 초대도 안 했는데 깜짝 놀랐죠. 우연히 제가 일러스트 작가로 활동하는 걸 알게 되셔서, 숨은 팬으로 인스타그램을 지켜보시다가 전시 소식을 접하고 오셨다더라고요. 안동에 계신 어떤 분이 제 전시를 보기 위해 대구에 아이를 맡기고 갤러리를 찾아 쭈뼛쭈뼛 사진을 청하시던 순간도 기억나요”

나를 응원해 주는 이를 마주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한창 번아웃이 심했는데 앞으로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갈 에너지를 얻었다.

가장 큰 성과는 ‘소소하이’로 활동하는 박지선이라는 사람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린 일이다.

그동안 일러스트 의뢰를 받아도 화상 미팅이나 전화·이메일로만 소통해 왔던 탓에 외톨이처럼 홀로 작업해 왔는데, 밖으로 나와 ‘나 여기 있어요’라고 존재를 드러낸 느낌이다. 실제 이번 전시로 그를 알게 된 지역의 한 문화예술기관 관계자 연락을 받기도 했다.

박 씨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지역 사회와 그림으로 소통하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됐다.

그는 “대단하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야망은 없지만, 더는 온라인으로만 활동하지 않고 진주에서 그림을 매개로 다양한 활동에 도전하고 싶다”며 “활동명처럼 소소하고 잔잔하게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오랜 기간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고 밝혔다.

백지영기자 bjy@gnnews.co.kr

 
박지선 일러스트레이터.
박지선 일러스트레이터.
박지선 일러스트레이터.
박지선 일러스트레이터.
박지선 일러스트레이터.
 
 
 
소소하이 作 ‘첫눈’
소소하이 作 ‘카페 데이트’.
소소하이 作 ‘할아버지의 썰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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