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시론]사회제도가 국가의 성패를 결정한다
[경일시론]사회제도가 국가의 성패를 결정한다
  • 경남일보
  • 승인 2024.02.2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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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김진석 객원논설위원·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몇 년 전에 그리스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인간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가’이다.

사실 역사가 길잡이가 될 수 있다면 그 역사의 혜택을 누구보다 많이 받은 그리스는 어느 나라보다 지혜롭고 행복한 나라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는 국민 한 사람이 은행에서 2주일에 840유로 이상은 인출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호메로스부터 아이스킬로스,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사를 빛낸 수많은 위인들이 후대에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며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런데도 왜 오늘날 그리스는 유럽의 병자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공하는 경제학 이론 중 하나가 ‘제도경제학’이다. 자연조건이나 역사와 문화가 아닌, 제도가 국가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고, 그 돈을 자기 것으로 지킬 수 있다고 믿어야 열심히 일한다. 그렇게 되려면 안정적인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 즉 법치주의와 신변 안전, 나아가 성취하고 혁신할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다.

그리스가 경제위기에 빠지게 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열심히 일해야 할 동기를 사라지게 만든 제도의 실패를 빠뜨릴 수 없다. 아무리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고, 세금은 지나치게 높으며, 대학을 나와 자격증을 따더라도 행정규칙에 막혀 마음대로 영업할 수 없다면 누가 정직하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겠는가?

한국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책이 있다. 지금부터 약 130년 전인 1890년대에 영국의 역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한국을 방문해 여러차례 전국을 여행하며 쓴 기행문이다. 처음에 비숍 여사는 한국인들이 매우 게으르고 독립심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그녀는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들의 마을에서 한국인의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곳의 한국 남자들에게는 고국의 남자들이 갖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많은 나태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 등이 주체성과 독립심 강한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중략)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성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 갔다”

똑 같은 한국인인데 왜 이렇게 다를까? 비숍 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 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 한국에서 농부들은 이익이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저 가족을 먹여살리고 옷을 입힐 정도로만 생산하는데 만족해하고, 더 좋은 집을 짓거나 품위있게 옷을 입으려 하지 않는다.”

‘맨큐의 경제학’ 첫머리에 ‘경제학의 10대 기본 원리’라는 장이 있는데, 10대 원리 중 하나가 ‘경우에 따라 정부가 시장 성과를 개선할 수 있다’이다. 여기서 ‘경우에 따라’라는 표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좋은 정부는 시장 성과를 개선하고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된 정부는 시장 성과를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우리도 수차례 경험해 봤지만 그 어떤 자연의 혜택도, 그 어떤 찬란한 역사와 문화도 잘못된 정부와 제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 증거를 그리스와 비숍 여사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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