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668)
강희근 교수의 경남문단 그 뒤안길(668)
  • 경남일보
  • 승인 2024.03.0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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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남명 선생도 시인이었다, 등불 아래 있었던 사람들(4)
-고 김충열 교수와 조옥환 사장과 그 주변
김충열 교수는 남명 선생 후손은 한미하여 마음만 있지 내외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알다가 학생이 한 사람 찾아왔고 그 다음에는 『월간 아시아』에 남명 관계 원고를 싣자 이를 읽은 조영기(삼장면 출신) 농협 중앙회 간부의 사촌 여동생(숙명여대 학생) 덕에 덕천서원과 그 주변에 ‘지자(知者)’가 나타났다고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7년인가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김교수는 조영기 씨가 자청하여 자기 차로 덕천서원 등을 안내하겠다는 연락을 해와서 그리던 지리산 남명의 만년 터전에 닿을 수 있었다. 새벽 일찍 서울을 떠나 부산을 거치고 진주를 지나 저녁 무렵 덕천서원에 도착했다. 서원에는 약 20명쯤 되는 부로(父老), 청소년, 부인들까지 미리 나와 김교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원 마당에 도열해 서서 맞이해 주는 것이었다. 김교수는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에 눈물이 괴었다. 그는 숭덕사 앞에서 절을 올렸다.

그때의 심회를 건넨 시는 다음과 같다. “대현을 추모하는 마음 간절해/ 새벽 서울을 떠난 우리는 저녁 때서야 지리산 남쪽 자락에 이르렀다./ 그 보고 싶었던 천왕봉은 구름에 싸여 우러러 볼 수가 없었는데/ 늙은 은행나무가 서 있어 덕천서원은 쉽게 찾아갈 수가 있었다./ 미리부터 나를 기다린 듯 부로들은 뜨락을 뛰어내려와 나를 맞이했고…왜 이제 왔느냐고 내 가슴을 친다/ 그리고 모두들 환호성을 올린다./이제서야 知者가 나타났다고….”

저녁은 조영기씨의 본가가 있는 대포리에 가서 먹었다. 조영기씨의 아버님은 조의생(曺義生) 노장이었고 덕천서원의 내임을 맡고 계셨다. 옛노인들이 다 그랬지만 한학이 깊으시고 면장을 지내실 정도로 신학과 경륜이 깊으신 분이었다.

김교수는 이쯤에서, 뒤늦게 찾아온 남명선생 직손이며 부산교통 사장으로 있는 조옥환씨와 어울려 내원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지리산 맑은 물에 목욕도 하고 그곳 특산물로 유명하다고 하는 꺽두기를 안주로 해서 막걸리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었다. 김교수는 이때 남명선생 현양사업을 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일하게 되는 ‘남명 사업의 불꽃’ 조옥환 사장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유행한 현대에서 나온 조그마한 하늘색 포니를 타고 왔다. 첫 인상은 여러모로 김교수 자신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키도 비슷하고 몸매와 얼굴 생김도 비슷하고 외고집 성격도 비슷하다는 등의 ‘한쪽’과 ‘또 한쪽’이라는 등대함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년지기로 서로 대취했다.

이날밤 대포에서 밤을 보내면서 조영기씨 가족들 노소가 하나로 조심하고 근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김교수는 조상이 사화에 당쟁에 역사에 묻혀가는 것을 한없이 통탄하고 억울해 했던 조씨 가문의 잠수(潛水)와 퇴락의 일단을 감지하고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고 또 돌았다. 그 순간 “육중하고 육중한 저 천석들이 종이/ 땅에 떨어져 오래도록 소리가 없네”로 화답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조옥환 사장 한테서 연락이 왔다. 두류문화연구소(진주 대아고등학교 박종한 교장의 사설 연구소)에서 남명 학술강연이 있으니 와서 강연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박종한 교장은 이 무렵 남모르게 남명선생 선양사업으로 경남사립중고등학교 교장단을 이끌고 남명제(南冥祭) 준비를 하고 있었던 선각이었다.

여기서 박종한 교장의 당시 학교운영은 독립 반진단 정신에 의거한 ‘오민교육’이었다. 한 마디로 민족교육이었다. ‘오민’은 민족, 민주, 민생, 민성, 민복으로 구체화한 정신이다.이 정신에 가닿는 것이 남명의 경의(敬義)정신이었으리라. 박교장의 이 학교에는 오민 전담 자문역이나 조교를 채용했는데 그가 고 김상현 교수였다. 그는 경상대 출신이자 후일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장이 된다.

그후 김충열 교수는 해마다 남명제 날에는 덕천서원 경의당에 서서 대중을 향해 남명선생을 일리는 강연을 했다. 특히 김교수는 조선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응분의 위상을 세우고 학문 내용상 마땅히 확보해야 할 영역을 점유하기 위해서 조선 유학 ‘사주설’을 주장했다. 집을 지으려면 네 기둥을 세워야 하는 것처럼 조선유학도 하나의 학문이라는 구조로 네 기둥이 필요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 네 기둥은 퇴계의 이론유학, 남명의 정신유학, 율곡의 개혁유학, 다산의 경세유학이라 부르며 남명을 한 눈에 익히도록 이끌고 갔다. 그럼 남명이 그런 훌륭한 면이 있으면서도 왜, 외면당해 왔는지에 대해 4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그때 지리산 운무가 걷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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