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작가 작업실과 군고구마
[경일춘추]작가 작업실과 군고구마
  • 경남일보
  • 승인 2024.03.2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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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경 갤러리 DOO 대표
정두경 갤러리 DOO 대표


지난 수요일, 봄이라기에는 아직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추운 날이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왕복 6시간 소요되는 작가님의 작업실에 도착하니 군고구마 냄새가 나고 있었다.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가 작가 작업실 방문이다. 가까이는 서울 시내나 안양, 양평, 가평, 춘천, 멀리는 홍성, 상주. 제주까지 다녀오곤 한다. 작가들은 대부분 개성이 강하고 자존감이 높은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온 존재와 영혼이 고스란히 담긴 내밀한 공간을 기꺼이 열어주어 방문할 수 있는 행운은 전시를 진행해야 하는 갤러리스트로서 누릴 수 있는 당연한 의무와 권리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감사함과 함께하는 귀한 설렘의 시간이다.

누구나 예술가의 작업실에 대한 판타지가 있을 것이다. 아틀리에나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근사한 작업실도 있지만 내가 찾아가는 대부분의 작업실에는 겨울의 추위를 막기 위한 실용적인 용도와 낭만적인 용도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난로가 놓여있다. 나의 군고구마에 대한 애정은 웬만한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정도여서 작업실을 방문할 때마다 작가들은 겨울이면 어김없이 고구마를 노릇하게 구워 내놓으신다. 추운 겨울날 따끈하고 달콤한 군고구마의 풍미를 한 입 가득 베어물고 작가들과 작품세계를 이야기하다 보면 세상의 시름은 잠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빡빡한 정신 줄이 말랑해지면서 노곤하고 행복한 기분이 든다.

어린시절 이글이글 타던 붉은 장작 숯불 아래 익어가는 고구마를 기다린 시간들, 장작이 타느라 토닥거리는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뜨거운 껍질을 조심조심 벗긴 후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고구마의 노란 속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나는 달콤한 환희였다. 군고구마는 여전히 시대를 관통하는 몇 안 되는 향수 어린 추억의 먹거리다.

젊은 날 소위 잘 나가던 서울의 안정된 모든 걸 버리고 서울과 멀리 떨어진 시골로 내려가 폐교를 작업실로 쓰고 계시는, 아직도 어린 왕자 같은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은 작가님을 만나는 시간 자체가 바쁜 일상 속을 달려가는 나에겐 잠시의 쉼이고 위로이다. 함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집에서 기타를 갖고 나올까 했다는 작가님의 낭만이 유쾌해 슬몃 웃음이 나고 이 시대에 이런 낭만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낀다.

꽃피는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져 더 이상 난로가 소용 없어지는 계절이 오면 작가들의 작업실에서 군고구마도 잠시 자취를 감추겠지만그 때는 작가님의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여유로운 낭만의 시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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