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현실 속 역설의 웃음을 자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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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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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단편모음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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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단편 모음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얘야 잊지 마라. 사는 건 누구나 다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 떨 일도 없단다.” (182~183쪽.)

삶의 고단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안에 담긴 아이러니함을 놓치지 않고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소설가 천명관의 두 번째 단편 모음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창비)가 출간됐다.

객사한 남자 영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죽음이라는 아이러니를 그린 ‘봄, 사자의 서’, 섬마을 처녀의 질투심 어린 욕망과 이를 배반하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그린 ‘동백꽃’ 등 2010년 이후 문예지에 발표했던 8편의 단편을 모았다.

표제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구조다. ‘운수 좋은 날’의 설렁탕과 소설 속 냉동 칠면조는 주인공의 비극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한때 트럭운전사였다가 도박에 빠져 막노동자로 전락한 경구는 아내와 이혼한 채 말조차 잘 섞지 않는 딸과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무리 지 에미를 때렸다지만 애비를 경찰에 신고하는 년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미숙이 년도 하는 짓이 지 에미랑 똑같다.” (114쪽)

그의 고단한 일상을 위로하는 것은 오로지 술 뿐. 냉동창고에서 희망없는 노동으로 전전하는 그에게 하루는 창고 주임이 냉동 칠면조를 건넨다.

하지만 경구는 칠면조를 받아들 때부터 “횡재를 얻은 기분이 아니라 어쩐지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 든다. 그냥 버리고 갈까 망설이지만, 한마리 가격이 노가다 하루 일당이라는 말에 차마 버리지 못한다.

집으로 향하는 도중 술값 외상을 독촉하는 노래주점 사장과 시비가 붙은 경구는 결국 그의 머리를 향해 칠면조를 내리치고 만다.

“죽은 걸까? 대갈통이 깨졌으니 뒈졌겠지. 경구의 머릿속은 온갖 끔찍한 이미지와 절망적인 생각으로 뒤죽박죽되어 쓰레기통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126~127쪽)

경구는 시동을 걸어둔 채 길가에 세워둔 벤츠 트럭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실었다. 조수석엔 비닐봉지가 다 찢어져 비어져 나온 얼어붙은 칠면조가 동승했다.

이어 자신의 트럭인양 거리낌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보니, 스스로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깨닫는다.

“언 칠면조가 슬슬 녹으면서 비어져나온 살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경구는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칠면조를 만져보았다. 차갑지만 두툼한 살집이 믿음직스러웠다. 혹시 마누라를 만난다면 선물이라며 칠면조를 불쑥 내밀어도 재밌을 것 같았다. 그때 아내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30쪽)

귀농 실패자의 몰락을 그린 ‘전원 교향곡’ 역시 비극적 상황 속에서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되는 주인공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냈다. 아들을 문 셰퍼드를 물어버리는 웃지 못할 희극적 상황에 이어, 그 모든 비극의 원흉이라 생각한 돼지 축사를 불태워버리는 마지막 장면은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마지막 악장과 절묘하게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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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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