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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3>촉석루와 진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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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8  22: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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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촉석루와 진주성./사진=경남일보DB

촉석루(矗石樓)와 진주성(晉州城)은 진주를 대표하는 상징이자 충혼(忠魂)정신과 진주역사가 집약돼 있는 문화의 요람이다. 촉석루는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관광 베스트 50’에 들었고 진주성은 ‘한국관광 100선’에 3회 연속 선정된 바 있다.

도심을 유유히 흐르는 남강가 절벽 단애(斷崖)를 활용해 성을 쌓고 촉석루를 앉혀서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를 이룬다. 실제 촉석루에 기대어 남강을 굽어보면 강 특유의 유려한 동선과 고색창연한 성돌, 멀리 도시의 건물과 아파트촌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평양 부벽루·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꼽는다.

그러나 촉석루와 진주성의 화려함 이면에는 진주시민의 애환과 고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벼랑끝 전투가 벌어진 피의 전장이었다. 천년세월 시련과 역경의 부침은 근세에 와서는 마침내 문화적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촉석루(경남도문화재자료 제8호)는 전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던 주장(主將)의 공간이었고 평시에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의 공간이었다. 1241년(고려 고종 28년) 목사 김지대가 창건하고 1322년 통판·안진이 재건했다. 두 주인공 김 목사와 안진이 장원급제하는 바람에 장원루라 불렀다. 임진왜란 왜적 침입 시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면서 남장대라고도 했다.1949년 국보 276호 시절 촉석루.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모난 돌이라는 뜻의 ‘촉석’ 과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누각’이란 의미다. 하륜의 촉석루기는 ‘담암 백문보(澹菴 白文寶)의 초기 누기를 인용, 누(樓)를 짓고 이름을 촉석(矗石)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수많은 전쟁으로 소실과 중건·중수를 거듭했다. 1379년 왜구의 침략으로 소실된 뒤 첫 중건은 조선 1413년이었다. 좌우 서각·동각에 4개의 부속누각을 지어 지금보다 훨씬 더 웅장했다. 서쪽에 서각인 임경헌과 그 옆 쌍청당, 동쪽에는 동각인 능허당과 그 옆에 청심헌이 있었다.

두번째 중건은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 때 불에 탄 후 1618년 병사 남이흥이 예전의 것보다 더 웅장하게 중건했다. 촉석루를 돋보이게 하는 또 하나의 부속건물은 의기사이다. 2차 진주성전투 직후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촉석루와 경남일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909년 11월 본보 초대 주필 위암 장지연이 촉석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江上巍巍矗石樓(남강 위 우뚝한 촉석루)/ 晉陽因此擅名州(진양 땅 촉석루로 명성 높네)/ 當年將士今安在(삼장사는 지금 어디 있는가)/ 江水滔滔不渴流(강물만 도도히 흐르네)’ 주필은 지령 3호(11월 7일자) 1면에 이 시를 실었다.

촉석루는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국보 276호로 지정됐다. 당시 유리 원판 필름을 인화한 촉석루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인 1950년 9월 1일 북한군이 지휘부로 이용, 미군기의 폭격으로 소실돼 국보가 해제됐다. 세 번째 중건은 7700만원의 성금으로 소실 10년만인 1960년 11월 20일 준공했다. 이 누각이 현재의 촉석루이다.

1958년 촉석루 중건 시 주춧돌과 대들보에 얽힌 일화가 있다. 사업가 김태영은 주춧돌 낙찰을 받은 뒤 질 좋은 화강암을 구하기 위해 전국에 수소문했다. 이때 석공 박지문이 창원 정병산 줄기에 대규모 화강암이 있다고 알려와 현장답사 후 이를 잘라서 사용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바위의 이름이 촉석바위였다고 한다.

대들보는 강원도 인제 설악산에서 잘라왔다. 수령 270년, 길이 21m짜리 전나무를 진주로 옮기는 일이 만만찮아 공병대대병력이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대들보가 너무 길어 도로와 철도주변 집을 78채나 헐었다. 군 병력이 동원된 것으로 봐서 대통령의 특명이 촉석루를 건립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남일보에 낙성식 관련 기사가 게재됐다. 1960년 11월 10일자에 ‘오는 20일 촉석루 낙성식-잃었던 옛 모습 10년 만에 다시 찾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6·25사변과 함께 잿더미가 됐던 촉석루, 타버린 지 만 10년 만에 옛 모습을 다시 찾아 전 시민의 환호 속에 오는 20일 하오 2시부터 공원 현장에서 낙성식을 거행케 됐다’고 썼다. 이 고풍스런 건축물은 훗날 경남도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된다.

신비한 면도 있다. 국내 한옥에는 수많은 비둘기가 날아들어 분뇨를 배설하는 문제점이 있으나 이곳엔 이런 현상이 없다. 논개의 의혼(義魂)때문이란다. 또 이 누각의 색다른 점은 ‘개방’이다. 열린 공간으로서 시민 누구나 찾아와 정담을 나누거나 토론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촉석루에는 ‘영남제일형승(形勝)’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남 최고의 지세와 풍경을 갖췄다는 의미다. 고려 말 이인로의 파한집에도 ‘진양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제일’이라고 했다. 이 외 당대 최고의 시인 문장가가 남긴 현판 2개를 비롯해 편액 17개가 있다. 촉석루에 올라 찬미시를 남기는 것이 문장가로 반열에 오르는 격이어서 찬미 시는 본루 862수(首), 부속누각 4개 등 총 1000여수에 이른다. 촉석루 첫 찬미 시는 고려 말 우문관대제학을 지낸 근재 안축(安軸)이 남겼다.

그러나 촉석루는 오랜 역사성과 국난극복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1950년 전쟁 때 불타버려 국보 지위를 잃었다. 진주시민들은 2013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국보환원운동을 전개했다. 문화재청은 4개 부속누각 부재, 가공된 주춧돌, 원형이 훼손된 돌기둥, 건축물의 연륜을 들어 환원하지 않았다.

 

   

토성으로 시작한 진주성(사적118호)이 언제 축조됐는지는 알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는 만흥산성, 고려시대는 촉석성, 조선시대는 진주성·진양성으로 불리며 고래로 선조들과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함께하며 이 고장에서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사진은 현재의 촉석루./사진=경남일보DB


진주성의 역사적 기록은 하륜의 성문기(城門記)에 따르면 고려 1377년(우왕 3년)에 토성을 또 쌓았으나 무너졌고 2년 후인 1379년 가을에 견고한 석성이 필요해 쌓던 중에 왜군이 쳐들어와 중단했다가 1380년에 완공됐다. 고려 말 첫 석성을 쌓은 후 그간 5차례의 증축·축소가 있었다.

임란 후인 1603년 경상우도 병사 겸 진주 목사 이수일이 우병영을 마산에서 진주성으로 옮기면서 성이 너무 넓어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축소했다. 임란 때 파괴된 성을 이 병사가 수축 때 외성과 내성을 구분, 북장대~촉석문 사이 내성 430m를 쌓은 것이 현재 성이다.

복장대 앞 공터는 1895년 5월 진주관찰부, 1896년 8월 경남도 관찰사 감영이 있었다. 도청 이전은 속전속결로 이뤄졌다. 이전 관련서류는 전날 한밤중에 우체국을 통해 옮겨졌고 관찰사와 간부들은 진주까지 연장된 경전선 기차의 시승을 빙자해 부산으로 가버렸다. 복장대 앞이 1925년 4월 1일 부산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도청자리였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성의 방어 역할을 했던 품(品)자 형의 해자(垓子) 대사지에 성벽을 허물어 주택지로 매립하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진주성 외성은 민간 주택들이, 내성은 군인 1만여명이 주둔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이전 100년 전까지 종(從) 2품인 우병사 집무청인 운주헌(도청 건물) 등 성곽부분 16개, 성 내부시설 123개 등 139개의 군사관련 시설물이 있었다.

진주성은 1969년 1차 복원에 착수, 1972년 촉석문, 1975년 내성 1760m를 복원했다. 2차로 1979∼1984년까지 내성 소재 민가 751동을 철거하고 국립진주박물관·야외공연장 등을 조성했다. 2002년 5월 1일 공북문 복원까지 33년 만에 내성 일부 복원이 이뤄졌다.

현재 진주성 규모는 임란 당시의 3분의 1 수준이다. 성곽 둘레는 1760m, 높이 5~8m이며 촉석루·의기사·임진대첩계사순의단·김시민장군전공비·촉석정충단비·쌍충사적비·김시민장군 동상·영남포정사·공북문·북장대·서장대·국립진주박물관·창렬사(김시민 등 39분)·우물 등이 있다.

진주시는 지난 2007∼2019년까지 980억원을 들여 외성 일부인 촉석문 앞 2만5020㎡에 있는 건물 81동을 철거, 진주대첩기념광장을 조성 중이다.

촉석문 등 성곽시설 5개, 촉석루 등 성 내부 시설 11개만 있고 사라진 군사건물이 111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됐다.

진주시가 남강유등축제와 연계, 추진 중인 진주성·남강유등놀이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성공과 촉석루를 국보로 승격하려면 부속누각 등 원형복원이 시급한 실정이다.

 

진주성 석각문과 촉석루 앞 암벽석각

공북문 입구 성벽에 ‘강희(康熙) 19년 산음 마병중초(馬兵中哨) 사천(泗川) 곤양(昆陽) 하동(河東) 단성(丹城) 함양(咸陽) 6관(官) 1초(哨)’ 석각문이 있다. 조선 숙종 6년에 표시된 이 석각문은 산청을 비롯한 곤양, 하동, 단성, 함양에서 진주성을 축성하는 담당 동원 인력을 표시한 성돌이다. 즉 한 고을에서 백인 1대의 병력이 동원돼 축성했고 이 산음군을 중심으로 6관, 즉 6고을이 1초(哨)씩 담당했다는 뜻이다. 이 성돌 석각문은 창렬사 서쪽 성벽에도 새겨져 있다. 촉석루 앞 남쪽 절벽바위 벽면에는 1905년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을 비롯해 고종황제의 종질이자 을사오적 중 한사람인 내부대신 이지용, 첩이 돼달라는 이지용을 향해 ‘매국노’라며 절개를 지킨 진주기생 산홍(山紅), 우병사 등 저명인사 40여명의 이름과 문장가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이수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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