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익어가는 칠월
청포도 익어가는 칠월
  • 경남일보
  • 승인 2019.07.1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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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
윤위식
윤위식

이육사가 살던 고장 청포도가 익어 가면 내 살던 고향에는 옥수수가 여문다. 옥수수 꺾어다가 모깃불에 구워내어 전설을 불러오는 할머니의 대 평상에 올라앉아 이손저손 옮겨가며 하모니카를 분다. 북두칠성이 초가지붕의 용마루위에 걸터앉을 때면 휙! 하고 하늘을 가르는 별똥별의 긴 꼬리 끝을 붙잡고 소원도 빌어본다.

초벌메기 벼논에서 허리 굽힌 고단함에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마루청을 들썩이고 횃불 들고 천렵 갔던 삼촌들이 돌아오면 어머니의 풋고추 다지는 도맛소리는 부엌에서 요란하다. 짚방석 내다 깔아 이웃사촌 불러 모아 양푼에 한 가득이 막걸리 걸러놓고 도란도란 이마를 맞대면 모기 물까 염려되어 할머니의 부채는 허공에서 춤을 춘다.

이제는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고향의 칠월이고 식어버린 가슴을 다시 데워야 들을 수 있는 전설이 되었다. 세월의 강 건너편에는 우리들의 아련한 초상이 아직도 가슴 따뜻한 온기로 남아서 돌아보고 섰다. 현관문 찰가닥! 하고 닫아버리는 단절의 쇳소리가 매정스럽고 아래 위층의 사람들은 서로가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채 딴 세상의 사람으로 바꿔놓은 그 세월이 야속하여 애가타서 못 떠나고 머뭇대며 서성인다.

옛정 그리워 목말라하는 까닭조차 부질없는 환상이 되고 예리한 문명 앞에서 질박한 웃음은 냉소의 외면으로 따돌림을 당하며 그 따사롭던 가슴이 속절없이 식어가도 풍요의 환각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오늘이 서글프다.

육사는 식탁위의 은쟁반 위에 하얀 모시수건을 마련하고 고단한 손님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는 칠월, 우리는 옥수수랑 햇감자를 삶아놓고 이웃을 기다리며 다시 가슴에 불을 지펴야 한다.

닫혀버린 문 밖에는 내 이웃의 아이들이 뛰놀고 젊은이들이 내달린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고 젊은이들은 모두의 희망이며 노인들은 우리들의 보물창고이다. 그들이 있어 내가 이웃이 된다.

육사는 짓밟힌 영육까지도 함께 아우르며 광복이 찾아 올 길을 트며 문을 열었다.

우리의 것이기에 함께 누리고 싶어서다. 이제 우리는 흰 돛단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가난의 늪에서도 빠져나왔다.

우리도 식탁위에 청포도 따다가 쟁반 가득 담아놓고 하얀 모시수건도 마련하여 고달픈 몸으로 찾아 온 손님과 마주앉아 옛 이야기 알알이 꿰며 두 손을 흠뻑 적실만 하다. 그리하여 서로가 마주본 닫쳐진 문을 열고 주저리주저리 전설을 엮어 가면 좋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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