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111>
오늘의 저편 <111>
  • 경남일보
  • 승인 2012.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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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뇨. 선생님 죄송합니다.”

 필중은 진석의 시선을 피하듯 목을 옆으로 슬쩍 돌렸다. 담임에 대한 충동적인 동정심이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아냐, 괜찮아. 그나저나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진석은 서둘러 앞장설 태세로 방을 나섰다.

 “저어, 선생님…….”

 녀석은 말꼬리를 길게 끌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빨리 가자. 가면서 이야기하면 되잖니?”

 주제 모를 불안감이 가슴을 옥죄여옴으로 느끼며 진석은 녀석을 예리하게 곁눈질했다.

 “며칠만 더 여기 있다가 갈게요.”

 “왜?”

 화로 전이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진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 앞에 나설 자신이 없어서요.”

 “일단 내려가고 보는 거다. 맞아. 부딪쳐 보는 거야. 이 선생님도 말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일 무서웠어. 그들의 눈엔 내가 징그러운 벌레로 보일 것만 같았거든. 그것뿐인 줄 아니? 나 자신까지 나를 혐오스러워하고 있어서 미칠 것만 같았어. 몸속에 수많은 벌레들이 옴실거리고 있는 착각에 빠져서는 말이다. 사람들 피해 다녔어. 우선 마음이 편하더군. 어느 날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나환자 아들일 뿐이지 나환자는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더군.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뭘 어떡하느냐 말이다. 오기와 배짱이 생기더군. 어깨에 힘을 주곤 당당하게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어. 계속 피해 다녔다면 아이들 앞에 설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을 것이고 폐인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난 교직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단다. 너도 보람된 일을 하고 싶지 않니? 그러니까 이 생각 저 생각 해 가며 시간 낭비하지 말자. 응?”

 “선생님, 그럼 딱 이틀만 더 있다가 갈게요.”

 필중은 약속이라도 하겠다는 표정으로 진석을 바라보았다.

 “정말 약속할 수 있어?”

 진석은 도리 없이 혼자 산을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남편을 기다리며 대문 밖에 서성이고 있던 민숙은 골목어귀로 들어서는 필중의 할머니를 보며 목을 갸웃했다.

 “아이쿠, 사모님 아니세유?”

 주소만 들고 손자의 담임 집을 찾으려고 나섰던 노파는 민숙을 보곤 어지간히도 반가워했다. 

 “어서 오세요. 어쩐 일이세요?”

 덩달아 반색하면서도 민숙은 상대의 방문 목적이 무척 궁금해지고 있었다. 아침나절에 만났을 때와는 달리 기분이 좀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궁금증은 증폭되고 있었다. 

 “어디 나가시는 길인감유?”

아들아 다녀간 뒤 이제나저제나 돌아올 손자를 기다리던 노파는 해거름이 내리자 초조한 가슴으로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나이가 많아지면 남의 사정이 빤히 들여다보일 때가 있었다. 노파는 민숙이가 저녁반찬거리를 사러 나오는 길은 아니라고 그렇게 재빨리 점을 쳤다. 즉석에서 남편을 마중 나왔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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