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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인으로 남고 싶은 야인의 축구인생<경남축구열전> 김호 감독 (하)
임명진  |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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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10.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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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28일은 한국대표팀이 카타르에서 ‘도하의 기적’을 일궈낸 날이다. 일본은 ‘도하의 참극’으로 일본 축구역사에 오점을 남긴 날이기도 하다.

중동의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94미국월드컵 아시아 지역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최종 예선경기. 한국은 혼신을 다해 후반에만 3골을 뽑아내며 3대0으로 경기를 마쳤다. 그 시각 일본은 이라크에 2대1로 앞서고 있는 상황. 한국은 일본이 패하거나 비겨야 본선진출이 가능했지만 행운의 여신은 일본으로 기우는 듯 했다.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종료 30초전. 이라크가 극적인 동점 헤딩골을 장식하며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의 본선행이 결정되는 순간 선수들은 그라운드를 누비며 기뻐했다.

지옥과 천당을 오르내린 카타르 도하에서 한국대표팀의 선장 김호 감독은 눈시울을 적셨다.

◇‘1993도하의 기적’을 추억한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났다. 김호 감독은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한 듯 했다. 하긴 그의 축구인생에 그만큼 극적인 순간이 또 있을까 싶다.

“ 말 그대로 기적이지. 우리 경기가 끝났는데도 일본이 이기고 있었으니깐. 그런데 갑자기 무전을 통해서 이라크가 동점골을 막 넣었다는 거야. 어떻게 됐겠어. 그야말로 난리가 난 거지”

“정말 한국축구사에 그런 극적인 월드컵 진출이 두번 다시 있을지 모르겠어요”

공감한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짓는 김호 감독이다.

“그렇지. 만약 본선진출에 실패했으면 정말 축구를 그만 둘 생각을 했었어. 마침 그때 경기장에 달이 떠 있는데, 그걸 보면서 눈물이 나올 뻔 했다니깐. 허허”

그러면서 도하의 기적은 알고보면 일본의 작품이라는 뜻밖의 말을 꺼넨다. “원래는 최종예선 개최지는 제3국인 말레이시아가 유력했는데, 일본이 갑자기 카타르 도하 개최를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어. 그게 자기들한테 유리하다는 거지”

당연히 중립지대서 경기를 할줄 알았던 한국은 일본의 입장 변화에 크게 당황했다. 그렇게 한국은 이란, 이라크, 사우디와 차례로 만나는 최악의 대진을 만난 반면 일본은 한결 수월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이라크는 그렇게 까지 일본을 악착같이 물고 넘어졌을까. 당시 이라크는 비겨도 탈락이었다.

일본은 92년 자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축구대회서 사상 처음으로 우승했다. 당시 일본과 이라크와의 경기가 일본의 거친 플레이로 과열되면서 이라크 선수들만 무려 3명이나 퇴장 당하고 1년 동안 출전 정지를 당했다. 이라크는 크게 반발했다.

그 현장을 당시 대표팀 전임 감독이었던 김호 감독이 지켜봤던 것. “그때 일본 관계자들에게 그랬어. 너희들은 언제나 이라크 때문에 한번 타격을 입을 거라고. 결과론적으로 그게 도하가 된 거지.”

◇최고의 월드컵…내 마음속의 해단식은 아직

한국은 그렇게 일본을 제치고 미국 월드컵에 진출했고 김호 감독은 스페인, 독일 등의 유럽강호를 상대로 한국축구의 매운 맛을 제대로 보여줬다. 2무1패로 탈락의 고배는 마셨지만 역대 월드컵에서 최고의 선전을 펼쳐 보였다.

“수없이 나온 말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당시 미국 월드컵은 감회가 남다르 실 것 같은데요?”

“그렇지, 스페인전도 그렇고 볼리비아, 독일전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다 아쉽지.” 목소리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당시 한국은 첫 상대인 스페인에 0대2로 끌려가다 날쌘돌이 서정원의 극적인 동점골로 비겼고, 볼리비아전은 압도적인 경기에도 아쉬운 무승부에 만족해야 했다. 마지막 독일전은 압권이었다.

0대3으로 끌려가다 황선홍, 홍명보의 연속골로 추격하면서 독일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김호 감독은 유럽의 강호와 당당히 맞섰다. 팀도 도하 당시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김호 감독은 과감한 세대교체와 새로운 전술로 명승부를 펼쳤다. 그때까지 3전 전패로 허무하게 탈락했던 이전 월드컵과는 너무나 달랐다.

비록 오랜 염원이던 16강 진출 바람을 이뤄내지 못했지만 당시 한국대표팀의 선전은 세계축구가 한국축구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미국 월드컵이 끝나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께서 전화를 주셨어. 안타까워 하면서 ‘왜 안되는 거냐고, 원인이 뭐냐’고 물으시길래, 대답했지. 프로팀을 많이 만들어야 된다고.”

당시 한국의 프로팀은 고작 6개. 그러다보니 대학선수들도 대표로 선발되는 상황이었고, 선수 저변이 워낙 좁다 보니 주전 한 두명이 부상을 입어도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만약 그가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처럼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월드컵 최초 16강 진출의 꿈이 더 일찍 앞당길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당시 열심히 뛰었던 선수들이 너무 고마워. 그런데 귀국하니깐 협회에서 대표팀을 공항에서 그냥 해산을 시켜버리더라고, 지금까지는 묻어두고 있었지만 누가 그걸 옳다고 생각하겠어. 그때 선수들을 다 모아서 한번 식사라도 하려고 벼르고 있어, 내 마음속의 해단식은 아직은 아껴두고 있는 셈이지”

◇축구계의 마이더스의 손

“축구 감독으로서 대단한 업적을 많이 남겼어요. 이번에는 축구 지도자로 걸어온 길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세요”

“포항제철을 끝으로 모교인 동래고 축구부 코치로 축구지도자의 길을 들어섰지. 그때가 34살 쯤이었을 거야.”

“원래 축구 지도자의 길을 생각했던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니야. 사실 지도자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이거는 있었어. 만약 내가 지도자를 하게 된다면 스승인 안종수 선생님 처럼 좋은 지도자가 되자. 늘 메모를 하는 습관이 많이 도움이 됐지. 현역선수일 때도, 나 혼자서, 훈련하는 방법 이런 것을 많이 고민하고, 그런게 다 도움이 되더라고.”

“성적은 어땠나요?”

“가는 곳 마다 다 우승을 했으니깐, 모교인 동래고서 6년 동안 있으면서 나중에 대표 선수가 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그리고 실업팀인 한일은행에서 6년 동안 있으면서 9번이나 우승했어. 프로축구가 출범 한 뒤에는 현대에서 준우승을 한번 하고, 그 뒤에 수원삼성에 있으면서 우승을 많이 했으니깐, 정확히 얼만지는 나도 잘 몰라. 허허”

“수원 시절은 정말 대단했어요. 지도자로서의 누구도 이뤄내지 못한 굵직한 업적을 다 이루셨잖아요.”

김호 감독은 원래 정이 많고 주변을 잘 챙기는 사람이지만, 세월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히 수원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엔 그리움이 잔뜩 묻어났다.

“잊지 못하지. 수원 팬들이 아직도 나를 그리워하고 좋아해 주니깐, 수원의 초대감독으로 창단 당시부터 남다른 애정을 쏟아부었고, 좋은 팀을 만들려고 고민도 많이 했어. 당시에는 실험적이었던 서포터즈 문화도 정착시키려고 애를 많이 썼지.”

실제 그는 1999년에는 K리그, FA컵, AFC, 아디다스배 대회를 모조리 우승하면서 K리그 사상 최초로 시즌 전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에게는 수원은 영광의 시절이었고, 수원은 김호 감독이 있었기에 K리그 명문 구단으로 우뚝 섰다. 그렇기에 아직도 김호 감독과 그가 구축한 고데로 막강 트리오를 기억하는 축구 팬들이 많다.

“데니스가 참 악동이었지. 허허. 지금 다시 K리그로 돌아와서 강원에서 뛴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번 가봐야지.”

◇영원한 축구인으로 남고파

김호 감독은 2009년 대전시티즌을 끝으로 K리그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시도민 구단인 대전을 사상 최초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K리그 통산 첫 200승 고지에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

이제는 다시 녹색 그라운드가 그리워질법도 하지만 그는 크게 연연치 않아 했다. 그에게 물었다. “K리그로 다시 복귀하고픈 마음은 없으세요?”

“글쎄. 나중 일을 어떻게 지금 알겠어. 지금은 모르겠는데, 비전을 제시하는 매력적인 팀이 있다면 생각해 볼 마음은 있긴 해”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꿈과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배운게 축구 밖에 없어. 나를 야인이라고 말하는 것도 축구협회에 안 들어가고, 오로지 지도자의 길만 걸었기 때문일꺼야.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만약 협회에서 요청이 온다면 움직일 생각도 한번씩은 들어. 후배들을 위해서 뭐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많이 전수해 주고 싶어. 그런 축구인으로 오래 남고 싶은게 내 작은 소망이야.”

임명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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