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저편 <217>
오늘의 저편 <217>
  • 경남일보
  • 승인 2012.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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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도 모르겠다.”

너무 뜨거운 아내를 차마 떼어내지 못한 진석은 힘들게 쌓아올렸던 탑을 한순간에 부숴버리 듯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거나 말거나 하던 달이 하늘 속으로 아주 숨어버렸다. 아무리 봐도 눈부시지 않는 별들만 다투어 눈망울을 튀겨내고 있었다.

“어! 벌써 왔냐?”

딸의 방으로 돌아온 화성댁은 반짇고리를 끼고 앉아 있는 민숙을 보고 퍽이나 놀랐다. 들고 있던 가지는 허리 뒤로 숨겼다.

“벌써 오다뇨?”

민숙은 화풀이라도 하듯 불퉁하게 대꾸했다. 이어 남편과 옥신각신하는 것을 엿듣고 있었을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연상되는지 멋쩍은 얼굴을 했다.

“그래, 죽도록 하늘만 보고 왔냐?”

딸의 표정만 봐도 알겠다는 듯 화성댁도 덩달아 툴툴거렸다.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습기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이년아!”

‘오죽 힘들면 저런 말을 할까?’

그러나 화성댁은 가여운 민숙을 위로해 주지 않았다. 지랄개떡 같은 딸의 팔자를 죽으라고 원망하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온갖 욕을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어머니 언제부터 이래 욕쟁이가 되었소?”

평소에 이 년 저 년 소리는 입에 달고 있었던 어머니였다. 이렇게 많은 욕설을 한꺼번에 쏟아낸 적은 없었다. 말문이 막혀 버린 민숙은 어이없이 웃으며 이제 그만 잠을 청하자는 표정으로 이부자리를 폈다.

“이 어미 언제 네년 집에 와서 자고 가더냐?”

직성이 풀린 화성댁은 허탈한 얼굴로 목덜미를 슬슬 긁었다.

“달도 없는데 그냥 주무시고 가세요.”

빨리 몸을 돌리지 않는 어머니의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민숙은 어머니의 잠자리에

놓아둔 베개를 손으로 한 번 쓸었다.

“내 팔다리 내 마음대로 쭉쭉 뻗어놓고 잘 수 있는 내 집을 두고 딸년 집에서 왜 자누?”

화성댁은 몸을 싹 돌렸다.

“그건 주고 가세요.”

어머니의 손에 있는 가지를 본 민숙은 무심결에 그렇게 말해 버렸다. 말해 놓고 나서야 입이 간지러운지 손으로 입술을 살짝 눌렀다.

“내 정신 좀 봐.”

어머니는 오이 소쿠리께로 성큼 다가갔다.

“밥 위에 쪄서 무치면 맛있겠소.”

오이에 꽂힌 어머니의 눈을 의식한 딸은 굳이 냉국하려고 미리 따 두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오이 가지고 잘못 지랄하면 허리 다친다.”

차라리 거침없이 말해 버리며 화성댁은 들고 있던 가지를 오이소쿠리에 툭 던져 넣었다.

무어라고 대꾸할 말이 영 생각나지 않은 민숙은 그냥 가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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