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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돌아온 그라운드의 ‘무적탱크’<경남축구열전-마지막편>- 이흥실 경남FC 수석코치
박성민  |  smworld17@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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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1.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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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초 경남FC 감독이 공석일 때 마다 이름이 거론됐던 그는 이달 감독직에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경남은 이차만 감독에게 새 지휘봉을 맡겼다. 이미 전북에서 감독으로서 역량을 보여줬던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수석코치를 수락하고 고향팀을 맡았다. 저돌적인 플레이와 놀라운 순발력, 작은체구에도 몸싸움에 밀리지 않았던 ‘그라운드의 탱크’를 창원축구센터에서 만났다.

◇ 골목대장, 축구인생을 시작하다

진해 덕산초등학교를 다니며 논두렁에서 공을 차던 이흥실 코치. 그에게 노는 것 이라곤 축구밖에 없었다. 골대가 없으며 가방을 세워두고 공을 찼다. 아버지가 어렵게 가죽공을 구해 그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이 코치는 “(아버지가 축구공을 주었을 때가 그렇게 좋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뛸 뜻이 기뻤다고 한다. 이 코치의 재능을 제일 먼저 알게 된 데가 학교였다. 이 코치가 초등학교 5학년때 학교에서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축구를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저 친한 친구들과 공 차는 것이 좋아 거절했지만 졸업을 앞두고 마산 합포초등학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중학교를 가려고 하는데 합포초 감독님이 찾아오셔서 축구를 하자고 했어요. 그때 합포초가 축구를 잘했고 소년체전 대표이기도 했으니까. 결국 부모님과 의논한 끝에 보따리를 챙겨서 합포초로 가게됐죠”. 초등학교 졸업을 한해 늦춰 합포초에서 1년을 더 다녔다. 그래서 그는 초등학교 졸업장 2개를 가지고 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축구 인생은 시작됐다. 이어 마산중앙중, 마산공고에서 축구 선수로 활동했다. 축구 인생에서 대학 선택은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원래 부산 동아대 진학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감독의 권유로 경쟁이 치열했던 한양대로 진로를 바꾼다. “친구들 때문에 동아대로 가려고 했는데 한양대로 갔죠.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결정이었어요. 대표선수들도 빨리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니까”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미드필드 플레이에 능했던 그는 공격형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지키며 한국축구의 허리를 책임졌다. 이때부터 ‘탱크’라는 별명이 붙으며 자신의 시대를 예고했다.

◇ K리그 호령한 중원의 지배자

1985년 2라운드 지명을 받아 포항에 입단한 이흥실은 1992년까지 한 팀에서만 활약했다.

데뷔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는 1985년 21경기에 출장, 10득점 2도움을 기록해 K리그 신인선수상을 수상했다. 초대이다. 신인상에 이름을 올린 그는 이듬해에도 2년차 징크스를 날려버리며 주전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1986년에는 절정기를 보낸다. 포항의 우승을 이끌며 K리그 MVP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계속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장을 거듭한다. 그는 K리그 베스트 11에 5번(85, 86, 87, 89, 90년)이나 선정됐을 뿐 아니라 역사상 공격포인트 ‘30-30 클럽’을 최초로 달성하며 리그를 호령했다. “1985년 첫 신인왕이 생기면서 첫 해에 탔고 86년도에 우승하면서 MVP도 받았어요.. 지금 제주의 박경훈 감독이 결승골을 넣어 프로팀 가서 처음 우승이라서 기억이 남지요. 그해 참 운이 많이 따랐던 것 같아요”

월드컵에 대해 그는 아쉬움이 많다. 1982년 처음 태극마크를 달은 그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했다. 당시 최종예선에서의 우수한 성적으로 기대감이 높았던 대표팀은 현지 적응에 실패하며 3전 전패로 예선탈락의 쓴잔을 마신다. “우리가 일주일전에 이태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지요. 마지막 우루과이 전에 선수들 컨디션 가장 좋았으니까 그게 참 아쉬웠어요”

포항에서 선수생활을 마친 후 일본 이적을 준비했던 그는 전북 현대의 전신인 완산 푸마의 창단 소식을 듣고 마지막 선수생활 불태우기로 결정한다. “정식 창단 승인이 난 팀이 아니였어요. 그래서 FA컵 성적이 필요했는데 서울, 전북 등에서 후배들과 어렵게 합숙하며 준비했죠. 그런데 8강에서 고려대한테 져 잘되지 않았지요”고 말하는 그는 당시 안타까움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났다. 이후 그라운드를 내달렸던 탱크는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행 열차를 타게 된다.

◇ “내가 악역을 해야죠”

1993년 이흥실은 끈질긴 모교의 구애를 뿌리치지 못하고 마산공고로 향한다.

“사실 은퇴해서 고등학교로 가는 일이 잘 없어요. 다들 대학이나 프로팀 코치를 원하는 분위기니까요. 그런데 만일 그때 하지 않으며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요. 내 모교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젊었을 때 가야된다고 생각을 했죠”

마산공고에서 지도자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7년부터 이어진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과의 인연으로 2005년 전북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태리 월드컵에서도 룸메이트였고 2003년 브라질 유학을 같이 가기도 했어요. 고생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같이 하자고 했는데 정말로 전북에서 만나게 됐죠”.

‘닥공’(닥치고 공격축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강팀에 반열에 오른 전북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 “2005년 7월에 옮겼는데 첫 6개월 동안 2승 밖에 없어 힘들었죠. 그런데 FA 우승을 계기로 팀이 살아났죠”며 말하는 그는 전북 현대에서의 인연도 잊지못할 추억이란다. 이후 전북은 최강희-이흥실 체제에서 리그 우승과 아시아챔피언스 리그(이하 아챔)를 제패하며 정상에 오른다. 2012년 대표팀으로 떠난 최 감독을 대신 전북을 맡은 이흥실은 팀을 정규리그 2위에 올려놨지만 아챔에서 광저우에게 1-5로 패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감내해야만 했다.

“선수들 모두 고생했지요. 아무래도 감독 대행이 할 수 있는 부분이 한계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전북생활을 접은 이 수석코치는 고향인 경남으로 돌아왔다.

“아직 선수들을 다 알아보진 못했지만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터키 전지훈련 전까지 선수들 특성을 알기 위해 일찍 모이는 것도 다 내년을 준비하는 차원이지요. 이 감독님은 전임 페트코비치 감독만큼 자율적인 부분을 강조하시니까 내가 악역을 해야겠죠. 새로 영입한 신인들과 기존 멤버들 잘 융화해서 준비를 잘할 예정입니다” 고향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 ‘탱크’ 이흥실. 그와 함께할 2014 시즌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이흥실은
출생= 1961년 5월 28일 경남 진해
학교= 마산합포초교- 마산중앙중학교- 마산공업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선수경력= 청소년 대표(1982), 국가대표(1990), 포항제철(1985~1992)
지도자경력= 마산공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1993~2005 ),전북 현대 모터스 수석코치(2005~2011),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대행 (2011.12~2012.12 ), 경남FC 수석코치(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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