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112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112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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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2. 최초의 승리, 해유령전투
민심은 더없이 뒤숭숭했다. 어쩌다 들려오는 소식 중에 승전보는 하나도 없었다. 풍문 끝에 묻어나는 것은 조선군의 피비린내와 살점 타는 냄새였다.

조운은 더한층 비차에 빠져들었다. 초조했다. 시간이 없었다. 왜군은 지척에 와 있었다. 조선을 위기에서 건질 귀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그를 구해낼 수 있는 비차는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영영 그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강박감에 쫓기는 조운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둘님의 심정은 누구보다 복잡하고 막막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는가. 조선도 끝나고 남편도 끝나고 그녀도 끝나고, 그러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광녀의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골이 울렁울렁할 정도로 머리를 흔들었다. 미쳤다. 남편도 미쳤지만 나도 미쳤다. 왜적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조선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님은 마음의 은장도를 꺼내들었다. 만약 비차가 끝까지 남편 뜻을 거스른다면 칼로 찔러버리고 싶었다. 광녀로 인해 스스로 돌아보아도 이중적인 인간으로 변해버린 그녀 자신의 목에도 칼을 대고 싶었다. 걱정은 걱정 위에 낙엽처럼 쌓이고, 사랑과 증오는 미친 말이 이끄는 수레바퀴같이 교차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둘님이 지옥과도 같은 힘든 시간에 부대끼고 있을 때, 조운은 자신이 다듬은 대나무에 찔렸다. 톱날에 손톱을 잘렸다. 자살을 하려고 마끈을 공터 나뭇가지에 둥글게 말아 걸어놓고 그 속에 목을 집어넣었다가 제풀에 놀라 얼른 빼내었다. 그러고서 비차의 잔해 위에 쭈그리고 앉아 최후의 탈출구처럼 생각했다. 차라리 비차를 포기하고 모병관을 찾아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나는 비겁한 놈인지도 모른다. 영원히 만들지 못할 줄을 알면서도 비차를 핑계 삼아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는 나쁜 인간이다. 대나무와 무명천을 던져야 마땅할 것을.’

조운이 생각하는 그대로였다. 그즈음 이 나라 농민들은 농기구를 던지고 창검을 잡았다. 상인들은 등에 진 물건을 내려놓고 어깨에 화살집과 활을 넣는 통을 메었다.

조운은 그더러 지원병이냐고 묻던 시골 촌로 얼굴이 떠올랐다.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던 장승이 비차처럼 추락하던 환영도 되살아났다. 그러자 망가진 채 땅바닥에 나뒹구는 대나무 몸체가 부서진 장승 몸통으로 변하고, 갈가리 찢겨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무명천 날개가 빠져 나간 장승의 허연 이빨로 바뀌었다.

‘내가 왜 이러지? 또 광증이 덤벼들고 있구나!’

조운은 와락 무섬증이 솟았다. 아내 둘님이 그곳으로의 발길을 끊어버린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지독한 이 외로움 그리고 울분. 광녀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 이후로 둘님은 비차 제작장 근처에도 어른거리지 않음은 물론이고, 집에서도 비차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조운으로선 미치지 않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예의 그 웃음소리를 내며 광녀가 동쪽 능선을 타고 그곳 분지로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조운 혼자만 있는 것을 알고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조운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이미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같이 보였다. 도원,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나 연 한 개 더 만들어 줘’ 하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저곳에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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