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과 분노할 자격
‘징비록’과 분노할 자격
  • 경남일보
  • 승인 2014.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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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준 (진주동명고 교감)
1604년 서애 유성룡은 임진·정유왜란이 끝난 후에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징비’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는 의미로 전쟁의 원인과 상황, 군국정무 문건과 대책을 조목별로 진술하면서 국방과 정치 전반을 포괄하였고 ‘녹후잡기’에서는 당시의 일을 개괄적으로 논평했다. ‘징비록’은 제목에서 보이듯 뚜렷한 목적의식을 바탕으로 서애 자신이 왜란의 전 기간 동안 국가의 중요 직책에 있으면서 몸소 경험한 바를 기초로 하여 전란의 대책을 세우는 가운데 얻어진 풍부한 사료와 지식을 담은 것이기에 가치가 매우 크다. 난중의 사실과 인물평을 당색에 구애됨이 없이 객관적으로 서술한 것도 큰 특징인데, 이 책이 후일 국가 개조에 미친 영향을 알기는 쉽지 않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꿈에서도 떠올리기 싫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우리 주위의 안전불감증은 여전한 것 같다. 지난 5월 13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의 화재발생 대피훈련에도 4000여 명의 근무 인원 중 800여 명만 대피에 참여했다고 한다. 교육 현장인 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은 데, 근자의 각급 학교의 지진이나 화재발생 대피훈련에서도 학생들의 느릿느릿한 행동과 즐기는 듯한 표정에서도 불감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근자의 여러 사태에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과 수습에 무능한 정부를 두둔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정치권과 일반 국민인 우리에게도 책임이 큰 것 같다. 그래서 먼저 국회의원들께 묻는다. 그 힘센 상임위 활동과 해마다 요란하게 벌인 국정감사에선 뭐하고 지금에서야 담당 장관들을 불러 사퇴하라 호통치는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가. 제일 먼저 석고대죄하고 사퇴해야 할 대상은 바로 당신들이 아닌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

국민들께 묻습니다. 우리나라가 2014년 OECD 회원국 중 보행자 사망률 1위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는지요? 건물주나 여러 업소의 주인들께서는 비상계단을 폐쇄했거나 있어도 잡동사니로 통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고, 거기에다 소화기는 오래되어 안전핀도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닌지. 토목·건축업을 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공사 편의를 위해 관련 공무원들을 접대해본 적은 없는지. 시민들은 운전 도중 사이렌 울리는 구급차를 외면하거나 민방위 훈련을 귀찮아하지는 않았는지. 화물차 운전자께서는 적재정량의 서너 배의 화물을 싣고 달리지는 않았는지. 특히 수도권 시민들께서는 정원을 초과한 채 위험스럽게 질주하는 빨간색 광역버스, 대형 참사가 예상되는 그 버스를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탄 적은 없는지요. 부모님께서도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 제치고 오직 이기기만을 강요했던 학부모는 아니었는지요?

포효하는 분노는 며칠 안 가지만, 절제되어 가슴에 켜켜이 쌓인 슬픔은 평생 가는 법이다. 그래서 참담한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는 촛불을 들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징비록을 써야 할 때다. 그래서 싱그러운 유월의 아침에 나는 묻는다. ‘내 눈의 들보’를 못 보는 우리는 진정 분노할 자격이나 있습니까?

 

문형준 (진주동명고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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