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양과 청렴의 CEO 표상 도고 도시오(土光 敏夫)
도고 도시오는 1896년 오까야마 현(岡山縣)에서 태어나 1920년에 도쿄공업대학의 전신인 토쿄고등공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민간조선소의 선구자였던 도쿄 이시카와지마(石川島) 조선소에 입사하였다. 1950년에는 이시카와지마 조선소 사장으로서 회사의 경영합리와 재건에 기여하였다. 1960년 이시카와지마 중공업은 하리마 조선소와 합병하여 이시카와지마 중공업(IHI)으로 탄생하게 되는데 그가 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4년간의 재임 기간에 IHI는 세계적인 조선소로 성장하게 된다. 그가 68세이던 1965년에는 실적이 부진한 도쿄 시바우라 전기(현 도시바)의 사장을 맡아 도쿄 올림픽 후에 활력을 상실한 회사를 일류기업으로 부활시켜 놓았다. 그리고 1968년부터는 게이단렌 부회장으로, 1974년부터 1980년까지는 제 4대 게이단렌 회장을 역임하게 된다. 1981년에는 85세의 나이로 임시행정조사회 좌장으로서 100조 엔의 재정적자를 안고 있던 일본 경제의 재건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도 냉난방이 안 되는 도쿄 외곽의 20평짜리 조그마하고 허름한 2층 목조 집에 살면서 낡은 양복 몇 벌로 평생을 지냈고 구두는 창을 갈아 신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평소에 이발소에 가지 않고 부인이 머리를 깎아주었고, 밥을 먹을 때도 반찬이 두 가지를 넘지 않았고 채소는 집 앞 텃밭에서 손수 가꾸어 반찬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5만 엔의 생활비만 남기고는 모든 수입을 어머니가 설립한 학교에 기부를 하였다. 도시바의 사장이면서도 집에 컬러텔레비전이 없는 걸 안 종업원들이 100만 대 생산기념으로 한 대를 구입해서 선물했다고 한다. 공장을 방문할 경우에는 종업원들을 모아 놓고 대화집회를 열곤 했는데 사보에는 매호마다 사장과 사원의 좌담회가 특집으로 실렸다. 그가 종업원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공장종업원들 중에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집으로 놀러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노조와의 관계도 중시해서 공장을 순시할 때도 항상 노조 간부를 대동하여 그의 경영철학인 ‘노사대등’을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 새벽 4시에 일어나서는 눈을 뜨자마자 잠자리에서 바로 독서를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불경을 읽고 산책과 목검 휘두르기를 한 뒤, 아침식사를 하고 6시 30분이면 출근을 했다. 그는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를 마다하고, 새벽 5시 첫 버스와 지하철로 출근하곤 했다. 그는 “하루의 승부는 아침 10시까지”라는 말을 하였고, 오전은 주로 혼자서 고도의 정신 활동을 요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점심은 주로 회사에서 메밀국수 한 장으로 때우곤 하였다. 오후에는 주로 현장에서 직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생생한 현실감각을 유지하며, 조직 관리를 하였다. 퇴근 후에는 별 다른 스케줄이 없는 경우, 집으로 가서 밥과 된장국, 정어리 한 마리와 채소로 구성된 소탈한 저녁식사를 하고는 잠들기 전까지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사람은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며 직원들에게도 퇴근 후에 허송세월 하지 말고 공부하기를 권장했다고 한다. 도고 도시오의 어머니는 “사회는 풍요롭게 개인은 검소하게”라고 종종 말하고 했는데, 그는 그 말에다 “사상은 높게 생활은 낮게”를 더 하여 생활신조로 삼았었다.
/경상대학교 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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