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41)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41)
  • 경남일보
  • 승인 2015.12.0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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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41)


그들은 마치 이곳에서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어떤 천대나 멸시도 감수해 낼 각오가 되어 있는 것처럼 불구의 삶을 감수했다. 언제 무엇 때문에 왜 이 곳으로 흘러들어왔는지, 양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과 맞닿아있는 아버지의 증오와 멸시…….

양지는 잇바디 사이로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빈속에 마신 술 탓으로 몸은 늘어졌지만 점점 명료해지는 의식의 한 쪽에 또렷하게 각인되어있는 의문이 떠올랐다. 위탁모의 집까지 갔다가 허탕치고 그냥 되돌아오는 길에 양지는 명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진즉 오지. 내일 와라, 오면 시원하게 말해줄게. 양지는 요점만이라도 말해주면 가겠다고했다. 그래, 꼭 그렇다면-. 명자언니의 목소리에 감긴 감정은 마치 똬리 튼 코부라의 독기처럼 격하게 건너왔다.

‘너희 엄마 해마다 찾아가는 언양 산소가 있지? 운명이라고 돌려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하고 살았던 우리는 너무 억울하다. 자세한 건 연변 할아버지가 오시면 밝혀지겠지.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 지금이라도 들어봐. 이게 증거니까.’

명자가 송수화기에다 카세트를 틀어 댄 모양이었다. 쏴아 거리고 끼끼거리는 기계음 속에서 의치를 문 듯 바람 샌 늙은이의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정신 나간 사람의 신음과 중얼거림처럼 분명하지 않은 소리를 듣다가 양지는 혼미해지는 머리를 전화 부스의 차가운 유리창에다 기댔었다. 웅얼웅얼로 밖에 들리지 않는 질 나쁜 녹음과 명자의 부언이 부풀어 오르는 취기에 밀려 아슴하게 멀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무언가 심각한 것이, 상식을 벗어난 엄청난 그 무엇이 목전에 당도해 있다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아버지와 양지네들의 초라한 환영이 대비되어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양지는 밑동이 잘린 듯한 허망함과 무안함을 끄기 위해 정신없이 취한 척 일부러 주정도 부렸던 것 같다. 그리고 삭힐 수 없는 참담한 심정으로 거리를 뛰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야할 텐데. 아직 무단결근을 해 본적은 없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양지는 어지럽게 남아있는 토사물의 흔적으로 울컥 욕지기를 느끼며 다리의 힘이 빠지는 무력감에 되감겼다. 다시 자리에 쓰러지며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출처를 알 수 없는 담배 연기가 날아 와 후각을 자극하며 밀려들었다. 지나가는 행인이겠지. 확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어서 눈을 감으려는데 누군가가 선뜻 부엌문을 비집고 들어섰다.

방어할 어떤 자세도 취할 엄두를 못 내고 엉거주춤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데 상대방도 이쪽과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이내 허연 치아가 쩍 벌어지게 반색을 했다. 현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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