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4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43)
  • 경남일보
  • 승인 2015.12.0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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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43)

‘요새 겉이 좋은 세상에 에린 걸 뭔 일부종사 시킬기라꼬 그 철딱서니한테다 딸리 보냈소. 그만 살짝 산부인과에 가서 긁어 내뻐리고 기도 망도 없이 숨카놨다가 안 듯 모린 듯 나이 차믄 에울 요랑하지.’

양지는 그 나이 든 동네여자들에게 정말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밭 매던 손길을 멈추고 속앓는 어미가 된 심정으로 정남의 가여운 처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비난 어린 동정을 받고 비참함을 견디기 어려웠을지라도 정남이만 그때 낚아챌 수 있었다면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터였다.

‘첩이 첩꼴 못 본다더니, 에미나 딸자식들이나 똑 같지 뭐꼬. 같은 여자로서 자기들 입장하고 되바꿔 생각하모 좀 미숙해도 감싸가면서 가르치지. 순하고 어진 게 딸아는 됐더만.’

시어머니뻘, 시누이뻘들 구박을 견디다 못한 정남은 동네 사람들의 무수한 호기심과 입살에까지 상처받은 멍 든 몸으로 사흘 전에 이미 가출을 하고 없다던 거였다. 그 집안 식구들이 얼마나 드센 인간들인데 악마구리떼처럼 달려드는 다섯 명 어이딸들 사이에서 어지간만 들볶이고 부대꼈으면 도망 갈 궁리를 했겠느냐고, 밭 매던 일손을 아예 멈춘 동네여자들은 양지를 향한 비난으로 끌끌끌 혀를 찼다.

양지는 돌아서는 뒷모습을 그들 앞에서 어서 감추고 싶었지만 빠른 걸음에 따라서 무릎이 자꾸 절름거려졌다. 저런 언니가 있었으면서-. 뒤통수를 그런 소리가 때리며 따라왔다.

그들의 말처럼 정남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왜 좀 적극적인 조처를 취하지 못했던가. 해도 해도 모자라는 후회였다. 다 같은 여자끼리 여자 하나를 감싸지 못하고 배척해 낸 그 집 여자들의 드센 성깔을 탓할 자격이 과연 내게도 있을까. 산부인과에 가서 싹싹 긁어 내버리고 없는 듯이 숨겨 놓았다가 다른 데로 시집보내면 됐을 거라는, 저들은 쉽게 말하는 그 현명한 방법을 자신은 왜 단박 실행을 못했던지, 그 생각만 하면 양지의 양심은 골 깊은 통증으로 가슴이 아렸다. 좀 더 일찍 육친에 대한 일로 골머리를 앓는 훈련이라도 되어 있었던들 그렇게 어물거리며 기회를 놓치고 말지는 않았을 거였다.

사파리자락을 펄럭거리며 앞서가는 현태의 넓은 등판을 바라보며 양지는 흠칫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남 같지 않다는 생각을 들킨 듯이 얼굴이 화끈했다. 솔직히 말해서 최 실장도 멋있는 여자는 아닌데 목매다는 총각이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이젠 어지간히 버티고 국수나 주지 그래. 강 사장까지 알고 그런 농담을 할 때면 양지는 정말 궁지에 몰린 느낌이었다.

남 앞에서는 담담한 체하지만 속으로는 한없는 비애를 느꼈다. 현태를 보는 관점이 그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곤혹스러움은 더했다. 남자가 남자답지 못하다면 그 남자는 생명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호쾌하고 박력 있음과 동시에 포용력이 있어야하며 약간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도 갖추고 있어야 남자다운 남자라고 양지 역시도 다른 사람을 평할 때 은연중 현태를 기준으로 묘사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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