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4 (47)
왜 한사코 저 남자를 거부하는가. 저 두툼한 손에다 차갑고 야윈 어깨를 맡기고 싶고 저 넓은 가슴에다 메마른 뺨을 기대고 싶은데 또 하나의 그녀는 올곧은 눈길로 현실을 바로 보라고 매섭게 꾸짖는다.
지난봄에는 양지의 생각도 어떻게든 생의 중간 과정을 결산해 보기로 정해놓고 있었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노처녀 신세를 면하든지 아니면 공부를 더 하던가 회사에서 독립을 하던가. 그런데 기 벌어진 일은 항상 결말을 요구하는 법, 그녀는 다시 얼크러진 가족들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행방을 몰라 그토록 애태웠던 정남이가 행려병자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창규네 가족들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자취를 감춘 지 거의 반년이 다 되어서였다.
그때도 저를 도와주는 사람으로 현태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그물망에 걸린 것처럼 현태의 친구가 근무하는 사무소 옆 보건소에서 연락을 받았다. 봐라 내 곁에는 네가 있고 음으로 양으로 너를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음을 알라는 듯이 현태의 음성은 차분하고 당당했다. 내 가족은 왜 한결같이 이 모양들인가. 무릇 솟구치는 짜증을 삭이며 양지는 현태가 가르쳐준 보건소의 문을 들어섰다. 정남을 보는 순간 소리쳐 꾸짖으며 직성이 풀리도록 흠씬 두들겨 패줄 작정이었다. 어디서든 잘 살아 보이겠다고 난양대로 도망을 쳤으면 잘 참고 잘 견뎌야지 이게 무슨 추태인가. 그녀와 같은 핏줄을 이어 받은 형제라는 것이 몹시 불쾌하고 씁쓸했다.
진료실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현태와 그의 친구가 아는 체 눈인사를 보내며 다가왔다.
“내 친구야. 구청 사회계에 근무하는 문 주사님이시지”
“잘도 아는 체 하네, 그냥 문수찬이지?”
“암튼, 공무원은 맞고. 너도 알지 이쪽?”
“아쭈 점점, 내가 왜 제수씨 될 분을 몰라. 그 이름도 대단한 최강양지 씨”
얼굴이 화끈해진 양지가 농담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찔러보자 문주사가 무안한 듯 얼른 말을 줄였다. 그리곤 양지를 얼른 병실 안으로 인도했다.
예방주사를 맞았는지 자지러질 듯 우는 어린애를 달래며 아이엄마가 나갔다. 하늘 색 커튼이 드리워진 옆 칸에서 콧노래 소리와 의료기구 부딪는 소리가 들려 올 뿐 한가하게 감돌고 있는 분위기는 분주하고 굳은 일반적인 병원들과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앞서 걸어 간 문주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벽 옆의 병상에 서 보였다. 높다랗게 걸려있는 주사용 팩을 먼저 발견한 양지는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몸을 간신히 버티었다. 온 몸의 힘이 좍 빠져나가고 가슴이 턱 막혀 얼른 침상 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겨드랑으로 현태의 팔이 끼어들어 잽싸게 부축을 했다.
눈길은 찰나에 누더기를 뒤집어 쓴 거지가면 하나를 보았다. 그게 사람이라고 안내되었기에 사람이라 여기지 도저히 사람으로 볼 수 없는 형상. 양지는 저도 몰래 고개를 돌렸다. 들불을 만난 들개가 불길을 피해 사경을 헤매다가 발견되면 저럴 것이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누렇게 치태 끼인 이빨을 무언가를 물어뜯을 듯 허옇게 드러낸 채 정남은 그렇게 주검처럼 뉘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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