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3)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3)
  • 경남일보
  • 승인 2016.01.1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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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3)

“최실장 집안 일 뒷조사까지 해 본 모양이야. 사장한테 하는 얘길 가만히 들어 보문. 조상 때는 떵떵거리고 살았지만 지금은 빈 껍데기만 남은 퇴락한 가문이고, 딸 형제만 줄줄이 있는데 늙은 아버지는 지금까지 오직 아들자식 하나 보고 싶은 일념으로 집안은 내몰라라 멀리하고 외방으로만 나돈다며?“

일이 그렇게 까지 진행되고 있다니. 양지는 자신도 모르게 하양을 노려보며 눈길을 모로 세웠다. 펼쳐놓은 교과서를 뒤적거리며 노트에다 뭔가를 옮겨 적고 있는 하양의 태연한 딴청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잖아도 아직 고등학생인 하양의 처세술은 노회할 정도로 능숙했다. 가난이 준 슬픈 이력이겠지, 하양의 처지에서 정남을 발견하는 아픔으로 아껴주고 있는데도 상관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일인데도 추 여사만큼 하양이 밉고 조급해지지를 않는다. 내가 이게 정상일까 싶을 정도로 안쓰러울 뿐이다. 하지만 챙길 건 챙겨 둘 필요가 있었다.

”아줌마, 병훈 씨한테서 연락 오면 연락처 전화 번호 좀 알려 주세요“

”병훈일 직접 만날래? 그래, 그게 좋겠다. 최 실장, 정말 잘해봐.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최실장이 남 같지를 않고…. 꼭 죽은 우리 은진이 같아서…“

목메는 음성이 수화기 저쪽에서 웅얼거렸다. 양지는 그들과의 첫 만남을 상기해 본다. 십 년, 아니 만 십 년 이 개월. 봉제회사의 노동쟁의에 연루되었다가 자취방으로 떨쳐나 있을 때. 통장은 바닥나고 구멍가게에 외상을 긋기도 민망해졌을 때. 미리 알고 있었던 듯 이력서를 드미는 곳마다 따가운 눈총만 받고 되돌아 서야했을 때. 노동운동의 행동대원은 여자라서 더 경계하고 괴물 취급을 당해야 했다.

여기 이렇게 주저앉기 위해서 그토록 애써 학력을 쌓고 청춘을 바쳤던 게 아닌데. 여자는 아무리 불이익을 당해도 분통 한 번 못 터뜨린단 말인가. 다 같이 파기해서 던진 불럭 한 장의 울분에도 남자는 뱃심 있고 당당해서 괜찮고 여자는 망종에다 괴물 취급을 하고. 이력서를 내미는 곳마다 제동이 걸렸다. 결코 자신의 능력이 다른 여타의 남자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만큼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독기를 품고 똬리를 틀었다.

그때 한 여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남편 잃고 혼자 나서서 나도 막막해.“

그 여자는 팔다 남은 보일러 몇 대가 달랑 놓인 구멍가게 같은 공장을 보여 주었다. 맡아 놓은 일거리도 같은 하청업체에서 낚아채 간다는 얘기도 했다. 그녀는 양지의 앙칼스러운 의협심과 굶주린 욕망을 필요로 했다.

”여자라고 결코 불리한 것만도 아니었어. 의외로 동정이 넘치는 어수룩한 곳도 있더라고. 여자의 약점과 강점을 적절히 구사하면 오히려 남자보다 유리할 때도 있겠더라구. 요는 지칠 때 서로 격려하고 힘이 되어 줄 믿을 만한 사람, 동지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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