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6)
  • 경남일보
  • 승인 2016.01.17 14: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6 (76)

양지는 깊이 모를 물가에 선 것처럼 무연한 시선으로 으스름에 젖어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싸늘한 볼과 손등을 비볐다. 한 무리 마차꾼의 행렬처럼 소란스럽게 바람이 지나가고 나자 주위가 괴괴해졌다. 낮 동안은 온통 웅성거리는 소음의 공간이었음이 믿어지지 않도록 적막감이 든다. 쇠붙이에 쇠붙이가 마찰되는 소리, 누구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 쉼 없이 여일하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들이 검게 검게 짙어지는 어둠의 깊이만큼 침잠되고 이제 막 콘크리트 건물과 트럭과 야적된 철재료들까지 흐물흐물 어둠의 입자로 뭉그러지기 시작한다.

모두들 집으로 갔다. 안식을 위해서, 가족들이 따뜻하게 둘러앉아 쉴 수 있는 곳 그 아늑한 공간으로. 그들이 간 곳, 집, 방, 가족 …. 양지는 음미하듯 또박또박 그 같은 단어들을 뇌었다. 자신과는 무관한, 너무나 먼 아득한 것들처럼 실감나지 않았던 말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꺾어 돌던 양지는 불현 듯 걸음을 돌려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걸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무실에 있을 때 전화를 걸고 나오는 건데. 전화를 걸어야 할까 말아야할까 망설이느라고 일부러 퇴근 시간을 늦추고 있었던 참이었다. 아무도 옆에 없이 혼자 앉아서 부끄러움 망설임 없이 할 이야기를 다할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나올 때의 결론은 아무에게도 전화 하지 않을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막상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 갈 것을 생각하니 누구에겐가 소리쳐서 화답을 듣고 싶었고 무엇이든 움켜쥐고 동류의식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서둘러서 준비한 동전을 넣고 0591지역번호를 눌렀다. 호남에게였다. 걷잡기 어려운 격정 속에 외로움, 그리움 같은 복잡한 감정이 얽혀 들었다. 국번이 갑자기 막혔다. 첫 번째가 7 다음이 6이던가 8이던가. 재발신 단추를 눌러놓고 지역번호를 눌렀다. 또 실패였다. 이번에는 집 번호의 둘째 자리 숫자가 막혔다. 하도 오래 전화를 하지 않아서일까. 아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그래. 국번이 없거나 결번이오니…. 녹음된 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수첩을 꺼냈다. 마침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좀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자 ‘최 호남’이라는 이름만 보았는데 금방 번호가 환하게 떠올랐다.

진 바지에 빨간색 차양모자를 쓰고 남자처럼 씩씩하게 경운기를 모는 농촌 아낙네. 그게 최 호남이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시골 농군 최호남은 너도 남편 꾀어서 도회지로 나가서 편안하게 살 생각 없느냐고 넌지시 떠보는 유혹의 말에도 단번에 노를 선언했다.

어디를 가도 노력 안하면 안되는 게 사람살인데 우중충한 시멘트 콘크리트 속에 갇혀 살면서도 같잖게 뻐기는 인간들의 종노릇이나 하느니 하느님 땅님에게 빌붙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여유 있느냐고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