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14)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14)
  • 경남일보
  • 승인 2016.03.01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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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8 (114)

양지는 모처럼 풀어놓았던 마음의 빗장에다 또 하나의 가름막대를 질렀다.

“아무리 그렇지만 그건 너무 황당한 요구야. 새로 시집오는 새댁이 어린애를 앞세우고 들어온다면 양지가 생각해도 얼마나 이상하겠어. 또 사람들은 얼마나 놀래겠어”

“우리가 납득하고 실행하면 되는 거지 남의 눈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하지만 우리는 아직 선선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야. 우선 나부터가 연습도 안 해 본 장애물 경기를 요구받고 있는 기분인 것도 사실이고. 앞으로 깊이 생각해 보기는 하겠지만 이 자리에서 단번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왜 간단한 얘기가 아닌가 말해봐. 남자들은 혼전에 얻은 아이도 별스러운 죄의식 없이 여자에게 키우기를 강요하면서”

“흥분하지 마. 네 얘기도 틀린 말은 아닌데, 걔 키울 사람이 어디 너뿐이야? 왜 하필 우리가-”

“지금 나보고 너라고 했어? 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송곳을 숨긴 음성으로 양지가 쏘아붙이자 당황한 현태의 눈이 띠룩 커졌다.

“어? 왜 갑자기 그래, 그 반응 한 번 묘한데?”

현태가 반문했지만 설명하지 않는 양지의 얼굴에는 살얼음 낀 미소 한 가닥이 흘러갔다.

“왜, 걔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

양지는 그와 마주앉아서 그의 동의를 구했던 구차스러움에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우리 집에서는 아직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당황할 만도 하지. 우선 그 얘긴 접어두고 우리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해 보자. 이 양반들은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께 고했는지 같이 한 번 내려오라고 할머니가 득달같이 전화를 하신 거야. 동갑네는 묻지도 말고 혼인하라나. 구정 넘기지 말고 결혼식 하라고 난리 났어. 나 때문에 동생들이 식도 못 올리고 애까지 낳아서 살림 살고 있고, 우리 집 교통상태가 대란 직전이잖아”

앞이 콱 막힌 심정으로 양지의 표정은 굳었다. 좋은 일이 있을까 기대를 부풀렸던 자신이, 도대체 그 좋은 일이란 게 무엇인지 한심해졌다.

양지가 일어나자 현태도 따라 일어섰다. 어디로 갈까? 현태가 물었지만 나는 배만 부르면 그만인 돼지가 아니라고 쏘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감정을 드러낼 필요조차 이제 없었다. 양지는 냉랭해진 마음으로 현태와 엇비껴서 걸음을 옮겼다.

순간 현태의 손이 독수리 발톱같은 악력으로 어깨를 낚아챘다.

“네가 잘 나고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하고 잘났어? 너 같은 게 걔 엄마노릇을 하겠다고? 이 나라 수백 년 인습을 단 순간에 깨뜨릴 수 있어? 잘 난 체 그만하고 그 따위, 그까짓 유아기적인 환상부터 먼저 깨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너는 병이 들어도 아주 고질병이 들었어. 이 문제도 네 알량한 고지으로 판단하고 접근할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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