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2)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2)
  • 경남일보
  • 승인 2016.05.0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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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2)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시와 때가 도래하도록 사연을 깊이 품어서 간직하고 와신상담해 왔을 따름이었다. 일시에 상대방을 쓰러뜨릴 기회를 얻을 때까지 독즙을 따 모으듯이 독한 인내를 저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만한 딸들을 등에 업고 어웅어웅 기어 다니던 자기 아버지와 친구처럼 어울려서 뒹굴던 명자네 집 식구들의 ‘버릇없고 막된’ 생활 모습. 명자는 그런 아버지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했다.

양지는 목이 졸린 것처럼 큰 숨을 토해 냈다. 아버지가 순순히 인정하려 들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불상사로 일이 번지게 될지도 몰랐다.



양지는 스며들듯 조용히 고향마을 진입로로 들어섰다.

층층으로 쌓아올린 높은 축대 위에 붕괴되고 황폐한 내면을 감춘 늙은 장수처럼 그래도 거만하게 버티고 선 고가는 멀리서도 잘 보였다. 그런데 양지는 언뜻 걸음을 멈추며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어떤 살풍경을 목격했다. 너무나 당혹한 나머지 자신이 엇비슷한 어떤 다른 촌마을로 들어온 게 아닌가 주위를 다시 둘러볼 지경이었다.

품이 넓은 가족처럼 마을을 아늑하게 둘러싼 보호수들의 울울한 수림이 움푹움푹 가라앉아 있었다.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고목들이라 나무 하나가 차지한 자리만 해도 지름 십여 미터는 족할 면적인데 그 많던 나무들이 거의 벌목되고 없는 자리는 황량해 보이기조차 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있다면 어릴 때 부르던 ‘나의 살던 고향’이라는 동요의 창작 무대일 지도 모르는 마을의 분위기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래도 그리운 집 생각이 나면 어린 가슴을 쿨렁거리며 흥얼거리던 노래속의 그 곳이었다.

그 무성한 숲을 이루던 거목들은 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아이들 서넛이 팔을 벌리고 둘러서도 잡히지 않던 우람한 등걸의 팽나무나 느티나무 참나무 등의 고목들 때문에 오래 된 마을의 운취는 더욱 장중했었다.

생장점이 구불텅구불텅 아무렇게나 뒤틀려 올라간 팽나무와 귀목나무며 투덜투덜 갈라진 참나무 틈으로 흘러나온 진액을 먹고사는 사슴벌레, 작은 날개를 팽이처럼 돌리며 부지런히 날아다니던 퉁뎅이들.... . 어린 가죽순을 따기 위해 간짓대를 든 어른 아이 없이 몰려들던 가죽나무, 그 옆으로 또 옆으로 키 작은 잡목들의 수장으로 버티고 서있던 이파리도 미끈하게 예쁘던 서나무, 소나기 만난 아이들의 머리를 우산처럼 가려주던 넓은 잎을 가진 오동나무들... . 그 아래 떨어진 입가심거리를 줍기 위해 놀이터 삼아 뻔질나게 오르내리는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던 밤나무, 굴밤나무 고염 나무들... . 특히 낮은 가지에 그네를 매놓고 뛰던 배롱나무, 그 위를 원숭이처럼 가지타기 하며 건너다니다 부러졌던 팔이 덧날까봐 쑥으로 뜸떴던 팔의 흉터는 아직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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