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6)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6)
  • 경남일보
  • 승인 2016.05.0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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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김지원


[박주원 장편소설] 갈밭을 헤맨 고양이들 10 (146)

정남의 요절이 깨우쳐 준대로 이제는 이쯤에서 확실한 방향 설정을 해야 할 때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거부하는 의식을 배반하며 여기 이 자리에 서있는 자신을 그녀는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의식과는 달리 그녀의 본심은 뒷걸음질을 하고 있다. 눈 먼 돈키호테가 되어 피 흘릴 가치 있는 그 무엇이 과연 이곳에 있기나 한가,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그녀는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며 주위의 사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의식적인 무관심 속에다 몽땅거려 넣고 녹슬도록 굳게 자물쇠를 채워서 내팽개쳐 버렸던 것들….

순간, 진저리 치듯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잊었다니, 잊었다니. 잊으려 했을 뿐, 잊으려고 갈망했으며 잊었다고 착각해 왔을 뿐, 눈으로 보았고 겪었던 것들 중 잊힌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생생했다.

끄잡아 당기려는 원치 않는 손길을 뿌리치듯 서둘러서 그녀는 안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당에는 두 묶음으로 나눈 베틀이 아버지가 패대기친 대로 조용히 일몰을 받아들이며 나둥그러져 있었다.

“아는 사람이, 민속 박물관인가 뭰가 한다꼬, 좀 찾아봐 돌라 캐서…”

쏘아보는 양지의 눈길을 의식하며 아버지가 먼저 주억거리게 했던 물건이다. 한 개의 부품이라도 더 들추어내기 위해 먼지투성이 더그매 위를 얼마나 헤집으며 기어 다녔는지 아버지는 전신에다 거미줄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왔었다.

“엄마가 옛날에 쓰던 명주 베틀 같은데요?”

“그렇제. 장마에 다 패 때고 없는 줄 알았더마 용케도 남았네 그려”

장마에 다 패 때고. 속으로 아버지의 말을 되뇌어 보자 저도 몰래 조소가 뿜어 나왔다.

‘아내가 반잠이가 되도록 길쌈을 한 댓가로 의식 해결을 한 못난 사내가 나요. 전시실에다 펼쳐놓고 광고라도 하자는 건가요?’

양지는 그렇게 쏘아주고 싶은 것을 무척 참았다. 하나 둘, 바디, 도투마리, 잉앗대, 부테…, 점검하며 헤아리는 아버지의 손길에 잔뜩 붙어있는 신명을 보자 눈에 천불이 일었다.

“삼베, 무명베 짜는 베틀은 흔해도 명주 베틀은 원래가 귀한 물건이거등”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요. 양지는 자꾸 오장이 뒤틀려 오르는 것 같았다. 언제, 남보다 월등한 재주를 지녔다고 한번이나마 아내를 대접해 준 적 있었던가. 해마다 하나씩 임신을 해서 곧 벌어지고 말 것 같은 맹꽁이배를 부테로 잔뜩 동여매고 배를 짜던 어머니. 아침에 보아도, 저녁에 잠자다가 깨어 봐도 그림 속의 여인처럼 베를 짜고 있던 어머니. 찰그랑, 찰그랑, 바디에 건 문고리 소리가 내는 마찰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무심하게 잠들었던 철없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누에고치 속으로 잠과 하루해를 몰아넣어 옷과 밥과 돈을 바꾸어 냈다. 솥에서 펄펄 끓는 누에고치를 휘저어 어머니가 끄집어낸 그 구원의 실오라기가 없었던들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걸 기증하실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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