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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98)<158>시집 속 인물, 6.25전쟁영웅이 되다(2)
김귀현  |  k2@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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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21  00: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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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에 의해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강삼수 경위(6.25당시 산청경찰서 소속)는 일제때 일본의 징병으로 버마 지역에 배치되어 전투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마병이 되어 전투에 참여하면서 말 뒷굽에 머리가 채여 왼쪽 이마 위에 흉터가 났다. 이를 가리기 위해 강경위의 가르마 타기는 왼쪽으로 휘게 했다.

강삼수 경위는 2차대전 최대의 접전을 보인 버마의 임팔전투(영국 대 일본)에 기마병으로 참여하고 일본군 5만여명이 전사한 그 곳에서 살아남았다. 그 전투는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4개월여 전개되었는데 영국군도 1만 70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마병이라 하니 일제 학병으로 갔다 온 소설가 이병주가 중국 소주에서 일본 부대 내에서 말을 사육하는 사육병으로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이병주는 그 사실을 이력에다 밝히고 그때의 그 일이 노예에의 복무라는 인식을 벗을 수 없는 멍에로 여겼다.

사실 이병주는 그 노예의식을 벗기기 위해 인생 후반에 쓴 소설로서 스스로의 자존을 복원해 내고자 한 것이다. 일테면 그의 소설 <마술사>에서 주인공 송인규가 일본 징병으로 나가 버마에서 전투에 참여하다가 억울하게 범인이 되어 체포되어 들어온 인도의 독립운동가 크란파니를 병영에서 탈출시킨다. 스스로도 탈출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일본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공을 통해 작가의 노예의식을 씻어낸다는 의도를 보인 것이었다.

강삼수 경위가 기마군으로 말에 관계되는 것과 이병주가 학병으로 가서 말 사육 사병이 되는 것이 묘한 일치감 같은 것을 준다. 강경위가 만일 작가라면 그는 일제에 복무한 일에 대한 자성의 기회를 작품을 통해 얻어낼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작가가 아니다. 광복이 되었는데도 강경위는 바로 귀국하지 않았으므로 고향에서는 전사했던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는 혼자 처져 귀국했으므로 고난 끝에 뒤늦게 귀국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산청경찰서에 들어갔고, 실전과 백병전에서 터득한 기량을 발휘하기에 맞는 사찰유격대 편제에 대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라 할까. 6.25 공간에서의 지리산 전투는 경찰의 경우 거의가 소수 정예가 필요한 백병전이었다. 강경위의 경우 이병주의 소설에 대치되는 행위가 파르티잔과의 전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투를 통해 일제 징병의 그림자를 지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강삼수는 전투에서 용맹, 자신감, 후퇴불가. 소수 부대조의 적진 침투 등이 그의 전략의 개략이었다. 필자는 어릴 때 산청 금서면 화계리 화계마을에서 살았는데, 이 지역 자체가 강삼수 작전권 안에 있었다. 강대장의 작전권은 지리산 발치의 금서면, 삼장면, 오부면, 생초면, 산청읍, 신안면, 신등면, 단성면, 시천면 등 산청군 전역이었다. 말하자면 지리산 동부를 평정의 권역으로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하동이나 함양, 남원 등 군이나 도 경계를 넘어 추격권을 넓히기도 했다. 당시 동네 최고 어른인 ‘진산어른’이 있었다. 그가 강삼수 경위의 용맹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를 필자는 시에다 담았다.

“동네 유지 진산 어른/ 묵은터로 토벌 나갔다 이제 돌아온/사찰유격대장 강삼수를 보고/강철아, 강철아 불렀다/ 동네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의 카이젤수염/ 이날 처음 누글누글해 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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