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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402)<162>의로운 시인 윤동주와 경남의 인연(3)
김영훈  |  hoo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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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01  22: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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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말한 대로 윤동주 시인과 경남의 인연은 남해,하동권 출신 정병욱 교수의 고리로 연결된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4학년 때(정교수는 2학년)를 회상하는 정병욱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극장을 들르지 않을 때면 명동에서 도보로 을지로를 거쳐 청계천을 건너서 관훈동 헌책방을 다시 순례했다. 거기서 또 걸어서 적선동 유갈서점에 들러 서가를 훑고 나면 거리에는 전짓불이 켜져 있을 때가 된다. 이리하여 누상동 9번지로 돌아가면 조여사가 손수 마련한 저녁 밥상이 기다리고 있었고, 식사가 끝나면 소설가 김선생(김 송)의 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가 한 시;간 남짓한 환담 시간을 가졌다. 그런 뒤 방으로 돌아와 자정 가까이까지 책을 보다가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윤동주와 정병욱이 연전 캠퍼스에서 수업을 마친 뒤에 이어지는 일과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시 정병욱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동주 형의 주변에도 별반 술꾼이 없었고 내 주변에도 술꾼이 없었기 때문에 술자리에 어울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가끔 영화괸에 들렀다가 저녁때가 늦으면 중국집에서 외식을 했는데 그때 더러는 배갈을 청하는 일이 있었다. 주기가 올라도 그의 언동에는 그리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다. 평소보다는 약간 말이 많을 정도였다.그러나 취중에도 화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의 성격 중에서 본받을 일이 물론 많았지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본받을 장점의 하나는 결코 남을 헐뜯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하숙생활도 얼마 가지 않아 그만 두게 되는 일이 생겼다. 일제 고등계(일본에서는 특고 경찰) 형사들이 하숙집 주인 김송 소설가가 요시찰 인물이라 하여 저녁마다 찾아와 하숙생들의 책상과 방안까지 뒤적이었기 때문이다. 서가에서 책 이름을 적어가고 고리짝까지 뒤지고 편지를 빼앗아 가는 법석을 떨었다.

윤동주는 이 무렵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무서운 시간>이라는 시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제는 점점 폭력의 마수를 뻗쳐오고 대학의 자유도 민족의 언어도 쓰지 못하게 하는 박탈의 시간, 그 시간은 무서운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를 누군가 부른다는 것은 하늘이 없는 나를 부르는 것이기에 왜 부르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4학년 시절에 그가 남긴 작품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시편들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서시>는 시집을 묶어내기 위해 원고 19편을 육필로 적고 맨 뒤에 쓴 것이다. 이 시가 인구에 회자되는 시가 되었다.“죽는 날까지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작품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 작품은 현재 일본 현대문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이 일본내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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