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오랜 세월을 새 장에 쓰다
허수경, 오랜 세월을 새 장에 쓰다
  • 김귀현
  • 승인 2018.11.25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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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산문집 고인 49재 맞아 재출간
지난 10월 3일 세상을 떠난 허수경 시인의 생전 작품들이 다시 출간됐다.

 문학계에 따르면 시인을 추모하는 49재가 지난 20일 오후 북한산 중흥사에서 많은 동료 문인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오래전 시인과 ‘21세기전망’ 동인을 함께했고 지금은 출가한 동명스님(차창룡 시인) 주재로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와 함성호, 이병률, 김민정, 오은 시인 등이 참석해 추모사와 추모시, 송사를 읽었다.

 시인은 198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해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와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뒤 1992년 독일로 건너갔다.

 생전에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까지 총 6권 시집과 함께 소설·산문집도 여러 편 발표했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시인의 49재에 맞춰 첫 장편소설 ‘모래도시’(1996)를 22년 만에 재출간했다. 문학동네 출판그룹 계열사인 난다는 산문집 ‘모래도시를 찾아서’를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펴냈다.

 출판사는 ‘모래도시’를 “시인의 49재에 바치는 헌화이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리운 목소리를 되새기고자 하는 작은 모뉴먼트(기념비)”라며 “발표 당시 서른셋의 젊은 나이, ‘처음’이기에 가득한 에너지와 그래서 더욱 생생한 문장이 살아 숨 쉰다”고 소개했다.

 산문집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는 시인이 마지막까지 붙든 책이라고 한다. 오리엔트 폐허 도시 바빌론을 중심으로 고대 건축물들을 발굴하는 과정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 ‘고고학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과 ‘사라짐’을 붙들고 있다.

 ‘작가의 말’에는 처음 책을 낼 때 쓴 글과 함께 시인이 눈감기 전에 쓴 글이 함께 실렸다. 시인의 마지막 육성을 듣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진다.

 “오래 죽어 있던 책./온전히 나였던 책./아프게 썼고, 처절하게 썼고,/무덤을 열고 들어가/나 스스로 죽음이 되어/모래 먼지의 이름으로 썼던 책./다시 숨을 쉬게 된다니/기적만 같다./이 기적이 내게도 올까. 온다면,/크리스마스에 벽난로 앞에 앉아/만질 수 있을 텐데./만지고 싶은데./될까. 그게.”

 그보다 앞서 쓴 것으로 보이는 글들은 한 편의 시로 읽힌다.

 “개나리 노란 한숨,/저 바람이 스치며 간다.//노란 한숨이 아직은 작게 내려오는/봄빛 아래에서//바람이 스친, 아린 자리를 쓰다듬으며/허공에 머물러 있다.//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고/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귤 한 알./인공적으로 연명하는 나에게/귤은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나는 그 작은 귤의 껍질을 깠다./코로 가져갔다.//사계절이 코끝을 스치며 지나갔다./향기만이./향기만이./그게 삶이라는 듯/병원 창틀에 작은 햇살이 머문다.//이런 날이면 어제의 오후엔/웬 눈이 왔는지 싶다.//청명한 오늘만을 살라고!/오늘만이 삶이라고!”

연합뉴스



 
허수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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