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인 결사대의 고장 영산…매년 추모 위령제 개최
‘23인의 결사대 애국선열들께서는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고 일제의 무력 앞에 맨주먹으로 항쟁하여 군민뿐만 아니라 영남일대 주민들의 가슴속에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심는데 꽃 같은 청춘과 일생을 다 바쳤다. 애국선열님들의 그 숭고한 애국심과 거룩한 독립정신은 지난 날 우리 겨레가 외침으로 겪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영원히 빛나는 민족자립과 자주, 민족자존의 금자탑이 되었으며, 온 천하에 알려졌던 뜨거운 애국애족의 열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마음속에 면면히 흘러, 후손들에게 귀중한 교훈이 되어 길이 남을 것이다’
창녕군의 3·1독립 만세의거는 3월 13일 영산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대표적이다.
창녕의 젊은이 23명이 모여 결사대를 조직, 만세의거를 대대적으로 일으켰으며 맨주먹으로 일본의 총칼을 상대했다.
창녕사람들은 창녕의 기개를 빛낸 23인의 결사대를 추모하는 위령제를 매년 3월 1일 남산 3·1독립운동기념비 앞에서 개최하고 있다.
◇영산 3·13만세의거…23인의 결사대 조직
창녕 영산의 만세의거는 서울 보성고보에 재학 중인 유학생 구중회가 그의 고향 친구 장진수, 김추은 등을 불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한 것이 시발점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3·1독립만세 의거 전말과 상황, 국제정세 등을 밤을 세우며 이야기 나누고 서로 의기투합했다.
마침내 3월 11일 밤 구중회의 사랑방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의거일을 13일로 결정했다. 이들은 야간을 이용해 목판으로 태극기 1만여 장을 제작하고 서울의 독립선언문도 요점만을 간추려 제작한 영산의 독립선언서도 인쇄했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도 함께 준비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동지규합과 사람을 모으는데도 힘썼다.
12일 밤 구중회, 장진수, 김추은 등의 인사들은 마지막으로 구중회 집에 모여 내일 단행할 거사를 숙의했다.
구중회, 장진수, 김추은, 남용희, 구남회, 구판진, 신암우, 장정수, 구판돈, 하은호, 서점수, 김두영, 조삼준, 박중훈, 김찬선, 최봉용, 이기석, 권재수, 하영규, 김금영, 이수철, 임창수, 박도문 등 23명의 결사단은 영산앞 남산봉에 모여 ‘결사단원 맹서서’에 각자 서명 날인 했다.
결사단원맹서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일 오등이 독립운동을 전개함은 조선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를 절대 지지하고 중앙에 호응하여 완전한 독립 주권국을 진취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등은 정의를 위하여는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대한 독립을 한사코 전취할 것을 맹세하고 이에 설명 날인함’
영산 결사대는 13일 영산 앞산 남산봉에서 개춘회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을 모아 독립만세 의거를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회합을 탐지한 일경들이 남산 밑 만년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집회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이에 결사대와 참가자들은 분개해 일경과 충돌이 빚어졌다. 이 소동에 인파들이 많이 나와 구경을 했다.
이 기회에 결사대는 농악대를 앞세우고 각각 가슴에 간직한 태극기를 꺼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장에 이르러 더욱 열기가 높았으며 해가 저물어 해산했다.
◇일경과 육박전까지 펼쳐
다급한 일경은 다음날의 시위계획에 몰두해 있는 결사대를 급습해 주동자인 구중회, 장진수, 김추은 등 대원들은 검거됐다.
이를 면한 결사대원들은 분함을 참지 못해 야간을 타서 창녕경찰서를 습격하여 동지를 구출하든지, 그것이 어려우면 다같이 유치장에 들어가든지 하자는 결연한 계획을 세웠다.
오후 8시께 일행은 창녕으로 몰려가는 도중 계성면 계성교 근처에 이르렀을 때, 무장하여 내려오는 일경과 일대 육박전이 전개됐다.
맨 주먹뿐인 결사대원들의 힘은 총과 칼로 무장한 일경에게는 당할 수 없어 불리함을 알고 작전상 산마루로 피했다.
이들은 양분하여 한 편은 화왕산 밑을 돌아 남창교로 들어가기로 하고, 한 편은 창락 아랫길로 가서 오리정을 거쳐 북창교에 들어가 장날을 기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다음날 3월 14일(음력 2월13일) 창녕 장날에 결사대원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시가행진을 벌이고, 일부는 창녕경찰서에 돌입해 구속된 장진수, 남용희, 구중회 지사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결사대원 전원이 검거됐다.
결사대가 모두 검거된 후, 뒤를 이어 영산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일본의 탄압과 구금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영산의 독립운동은 그후로도 지속되었다고 한다.
구속된 23명의 결사대원은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주동자 3명은 징역 10월, 10명은 징역 8월, 10명은 징역6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영산 3·1운동을 주도한 구중회 지사는 해방직후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만세의거의 열풍은 일본인들이 많이 나와 살았던 남지에도 어김없이 불어 닥쳤다.
남지의 피 끊는 젊은이와 주민들은 인근 영산에서 3월 13일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됐다. 남지주재소의 일경들도 영산의 독립만세 시위 진압 지원에 나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내 벌어진 창녕경찰서 습격, 격렬한 만세의거가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지사람들은 남지에서도 만세의거를 일으켜야 한다는 다짐이 조심스럽게 번져 나갔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심전심으로 전파돼 5일 후 남지장날인 3월 18일 남지시장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창녕지역의 만세시위는 들불처럼 일어났다. 독립을 바라는 창녕의 젊은이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기개는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정규균기자kyun@gnnews.co.kr
[인터뷰]“호국 충절의 얼이 살아 숨 쉬는 창녕”
이수영 경남도문화원연합회장(창녕문화원장)
이수영 경남도문화원연합회장(창녕문화원장)은 창녕의 3·1만세의거는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에 분연히 맞서 애국 청년들로 구성된 23명의 결사대가 조직적인 만세시위를 주도해 전군민이 이에 합세한 일대 사건으로 평가했다.
이에 3·1독립 만세의거 100주년을 맞아 “영산 3·1만세의거는 창녕군민의 자랑스러운 정신유산으로 남아, 우리 창녕인의 기상과 애국충절의 정서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의미가 깊다”고 감회를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창녕지역 3·1독립만세 의거를 평가해 본다면
-창녕군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영산3·1정신을 면면세세 이어가야 한다. 3·1독립 만세의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61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는 영산3·1민속문화제는 올해 58회째를 맞고 있다. 이 행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항일 애국선열들의 호국충절과 자유수호의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일이며, 둘째는 우리 고장의 대표적인 전통 민속놀이인 무형문화재 25호 영산쇠머리대기와 26호 영산줄다리기 등 각종 문화행사의 시연을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일이다.
◇영산 문화제의 전통성, 역사성을 강조한 의미는
-영산 문화제는 창녕군의 대표적인 구경거리인 ‘창녕 구경’중에 하나로도 손꼽힌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5호인 영산쇠머리대기는 나무로 만든 황소 두 마리가 서로 맞대결하는 형상으로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놀이다. 제26호인 영산 줄다리기는 올해 서울 청계천변에서 시연행사를 가짐으로서 호평을 받기도 했다.
영산줄다리기행사는 화합과 단결을 상징하며 매년 3월 3일 축제의 마지막 날 피날레를 장식한다. 줄의 동쪽과 서쪽은 각각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며 서쪽이 이기야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다.
영산지역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영산 남산에서 최초로 봉기하여 영산면 일대와 창녕군 전역, 나아가 경남과 전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도화선이 된 3.1독립만세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과거 백년을 회고하면서 새로운 미래 천년을 다짐하는 결연한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정규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