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흐리는 말, 새로운 언어를 구명해야 할 때
본질을 흐리는 말, 새로운 언어를 구명해야 할 때
  • 경남일보
  • 승인 2021.03.02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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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진 (경상대신문사 편집국장)
최근 ‘학투’라는 용어가 각종 언론 보도에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학투는 ‘미투’와 학교폭력의 합성어로 최근 스포츠계에서 연예계에 이르기까지 유명 연예인으로부터 학교폭력을 경험했다는 폭로를 일컫는 말이다. ‘학투’ 신조어가 등장하기 전에는 유명 연예인으로부터 돈을 떼였다며 그들의 채무 불이행을 연쇄적으로 폭로하는 ‘빚투’가 있었다. 이 또한 ‘미투’ 운동에 ‘빚’을 덧붙여 만든 용어다.

가해자를 고발하는 현상에 ‘미투’ 운동을 필수 격으로 붙여 사용하는 표현은 이미 만연하다. 이 같은 표현과 현상은 단순할지언정 ‘미투’ 운동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동향이 아니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남성 중심으로 구조주의화 된 사회 내부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일상적으로 자행되던 폭력이라는 심각성을 알리고, 그것이 누구나 겪게 될 수 있는 일임을 공론화하자는 의지다. 이어서 그 힘들을 결집하고 사회적인 연대를 이끌어 내 공감과 개선을 촉구하겠다는 목표를 갖는다.

성폭행·성추행 피해자 입장에서는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밝히기에 망설여진다는 것, 크게 알려지는 사실을 꺼리는 자체만으로도 이들을 암묵적으로 억압하는 오랜 사회적 편견이 기저해 있다. 이 점에서 학교폭력이나 채무 불이행 문제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현상에 ‘미투’를 덧댄 단어를 광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미투’ 운동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미투 운동의 배경이 갖는 특수한 맥락을 따져보지 않아 투쟁의 의미를 흐리진 않은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도 당했다’가 아닌, ‘나도 고발하겠다’라는 여성들의 주체적인 외침이 왜 있었겠는가? #me_too 해시태그를 달고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던 여성들의 용기는 어디로부터 나온 것이며, 서로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투쟁의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본래의 단어가 시사하는 사회적 의미와 중요성이 크다면, 훼손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따라야 한다. 자극적이고 눈에 띄는 헤드라인을 다는 데 수월하다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다수가 쓰는 용어를 그대로 카피해 너도나도 활용하는 자세는 온당치 않다. 아예 합당한 용어나 어휘 표현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 또한 ‘학투’, ‘빚투’를 쓰고 퍼 나른 자들의 몫이다.

이예진 경상대신문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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