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4)보는 눈 듣는 눈
배정인의 에세이는 픽션을 입는다 (34)보는 눈 듣는 눈
  • 경남일보
  • 승인 2022.08.3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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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완벽하게 쓰려면, 선생님 몇 번이나 퇴고를 하셨습니까?” 금아 선생님에게 ‘인연’에 대해서 직접 여쭈어본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 퇴고 안 해” 그러는 겁니다. 나는 하도 놀라서 모기만 한 소리로 ‘선생님, 한 번도 안 하십니까?’ 했습니다. 선생님의 미소 앞에서 나는 속으로 구둥거렸습니다. ‘천하에 금아 선생도 거짓말을 하네.’

‘꽃이 되는 글은 짓는 글이지 쓰는 글이 아니다.’ 그 무렵 나는 철통같이 믿고 있었으므로 내게 ‘퇴고 안 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백번도 더, 할 수만 있다면, 퇴고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즘엔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글은 쓰는 글, 짓는 글, 쓰이는 글이 있다. 펜을 들고 종이 앞에 앉으면 글이 절로 써지는 경지가 있다고. 그 경지에 이르면 그의 사전에는 짜야 하는 플롯이나 고쳐야 하는 퇴고 따위는 없을 거라고. 어쩌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 나는 내 재주 없음을 한탄하면서 부러운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그 경지를 바라봅니다. 꿈처럼. 그러고는 생각합니다. 누에처럼?

누에가 고치를 치기까지의 한 생애를, 생각이 말이 되어 글자로 써질 때까지의 한 생애로 여긴다면, ‘수필’에 있는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는 참으로 심오한 비유입니다. 누에는 뽕잎을 먹고 자랍니다. 한 생애에 잠을 네 번 자죠. 잘 때는 먹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깨면 허물을 벗습니다. 네 잠을 자고, ‘누에 한 밥 잡힌 듯’이라는 말로 비 쏟아지는 소리를 묘사한 문장도 있으니, 그렇게 먹고 다 자라면, 단식에 들어 속엣것을(똥) 죄다 내보냅니다. 몸집도 줄어듭니다. 그러나 마지막 단식에는 허물벗기가 없습니다. 잠잘 때 머리를 높이 들고 있는 누에의 그 모습은 그대로 묵상입니다. 물에 푼 횟가루 같은 투박한 몸이 노랗게 변하면서 몸이 초롱불처럼 밝아옵니다. 마치 빛이 들 듯이 꼬리까지 알른알른 투명한 금빛이 되면, 그제야 고치를 짓기 시작합니다. 고치를 짓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쉬지 않습니다. 한 올로 집 한 채를 다 짓습니다. 중간에 실이 끊어지면 그걸로 끝납니다. 그 누에는 짓다 만 고치 안에서 썩는데, 몸을 다 풀어낸 누에는 죽지 않고 변신을 합니다. 고치 안에 있는 변신한 누에를 우리는 번데기라 하지요. 누에가 올 하나로 지은 고치를 풀어 우리는 그 명주실로 비단을 짭니다.

여기서 누에가 글지이라면, 뽕잎은 글감일 것이요, 많이 먹고, 얼마큼 먹으면 그걸 삭이기 위해서 명상을 하고, 걸러내고, 구태의연한 허물을 벗어 던지고, 그 같은 행위를 몇 번이고 거듭해서는 드디어 순수에 이르렀다 싶으면 이번에는 허물을 벗는 것이 아니라, 먹었던 뽕잎이 물이 되도록 사유하면서 깊은 묵상에 드는 겁니다. 뽕잎이 물이 되고, 그 물이 맑아지고, 그 맑은 물이 몸에 배, 몸이 맑은 초롱불처럼 밝아질 때까지 안으로 안으로 삭이며, 오래오래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거지요.

이 과정이 세상에 제나냥으로 있는 생명체 하나를 얻어 사유라는 물에 담그고 상상이라는 불에 우려서 끝내는 새로운 생명체를 그리는 글지이가 해야 하는 고난의 행로일 것입니다.

금아 선생은 아셨거니 합니다. 이 길이 씌어지는 글의 도라는 것을. 종이에 글자를 적는 행위, 글을 쓴다는 이 짧은 의미는, 속엣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단순한 노동일 뿐, 글은 내 몸 안에서 투명해지도록 써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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