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꽃샘 추위를 이기는 ‘향설고(香雪膏)’
[경일춘추]꽃샘 추위를 이기는 ‘향설고(香雪膏)’
  • 경남일보
  • 승인 2023.02.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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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박미영 한국음식문화재단 이사장·이학박사


“기강이 무너진 너희 조선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 1587년 9월 1일, 오만방자한 일본 사신 귤강광(橘康光)이 조선 관리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날 일본 사신의 숙소였던 동평관에서 잔치가 있었다. 침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염탐하기 위해 보낸 자들이었다. 술자리가 질펀해지자 귤강광은 연회석상에서 후추를 뿌려댔다. 관리, 악공, 기생 등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후추알을 줍느라 북새통이 됐다. 질서도 체면도 없었다. 진풍경을 목격한 일본은 조선을 얕봤다. 후추는 귤강광이 던진 떡밥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이다.

전 세계 향신료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로 금값보다 비쌌다. 노예 열 명 값과 맞먹기도 했다. 후추는 한자로 호초(胡椒)라고 쓴다. 오랑캐의 향신료를 뜻한다. 비단길을 통해 송에 전해졌고 고려 때 수입됐다. 후추는 왕의 하사품이었으며 관리들의 뇌물이었고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백성들은 배의 속을 파내어 꿀배찜을, 귀족들은 배에 후추를 박아 수정과처럼 조렸다. 백성들의 향신료는 겨자와 마늘, 천채였고 귀족은 수입품인 후추를 사용했다.

감기와 코로나 후유증에 좋은 향설고는 산돌배로 만든다. 껍질을 벗겨 신맛 나는 씨 부분을 수평으로 저미고 각진 부분을 둥근 모양으로 깎는다. 후추를 배에 통으로 깊숙이 박아 생강, 대추, 계피, 황설탕과 같이 끓인다. 화려하지 않되 향기 그윽한 돌배는 명약 중 명약이다. 폐를 깨끗이 하며 심장을 맑게 하고 염증을 없애준다. 기관지에 특효다. 성질은 따스하다. 위로와 회복이라는 꽃말 그대로 치유력이 강하다. 돌배는 일반 배에 비해 작고 단단하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신고배 같은 재배종은 야생 배나무를 육종 개량한 것이다. 토종은 돌배다. 맛은 덜하나 항산화물질이 일반 배보다 몇 배나 많다. 꼭지를 따 껍질째 술이나 효소를 담기도 한다.

조선 후기 진주의 배(生梨)는 한 접에 1냥 6돈으로 홍시나 곶감보다 열배 이상 비쌌다. 겨울철 수령이나 관리들의 상에도 배가 올랐다. 나무는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제작할 때도 쓰였다. 다디단 재배종에 밀려 천대 받던 돌배는 코로나 이후 귀한 품종이 됐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가슴이 답답할 때, 향설고가 이로운 음식이다. 꽃샘추위를 이기는 약선음식이다. 돌배를 구분하기 어려우면 산길을 걸어보라. 봄꽃 희게 핀 어느 봄날, 온 산을 뒤덮는 향기와 꽃비 내리는 풍경을 보거든 그것이 돌배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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