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경 갤러리 DOO 대표
9년 전 봄에 졸저 ‘사다리 위의 여자’를 출간했다. 겉으로 고상하고 우아하게 보이는 갤러리 일이 실상 들여다보면 육체적인 노동이 꽤나 필요한 일이다. 작품을 설치할 때나 조명을 만질 때, 전시장 벽면 페인트칠을 할 때 사다리 위에 올라가는 일은 다반사다. 전문 페인트공을 불러 갤러리 내부 벽면 전체를 칠해 깨끗했던 벽이 1년이 지나니 여기저기 못 구멍을 메꾸어 그 위에 부분 덧칠해 놓은 게 지저분해 거슬린다. 지난 1년 간 못과 벽도 나와 같이 참 열심히 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쓰럽다. 한 전시가 끝나고 나면 다음 전시가 바로 이어져 페인트 칠을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지난 전시에서 남겨진 못자국에 핸디코트를 덧발라 메꾸고 그 위에 작품을 설치할 때가 대부분이다.
오늘은 모처럼 페인트 작업을 했다. 못 구멍을 메우고 사포로 문지른 후 그 위에 페인트로 덧칠을 해도 원래대로 매끈해지진 않는다. 조금이라도 지저분함이 가셔서 작가들의 작품이 돋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붓질을 하는 시간은 신성한 기분마저 든다. 우리 인간사도 상처 난 크고 작은 마음의 구멍을 메꾸고 그 위를 덧칠해 나가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바닥에 신문지를 꼼꼼히 깔고 롤러와 붓으로 페인트칠을 하노라니 데자뷰처럼 잊고 있던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아버지는 4학년인 언니와 나에게 아르바이트로 페인트칠을 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늘 근검 절약을 신조로 생활하시는 아버지께 받는 넉넉하지 않은 용돈에 목마르기도 했거니와 왠지 페인트 작업이 재미있을 것 같아 우리는 하겠다고 했다. 언니와 나는 버려도 좋을 긴 팔 셔츠를 꺼내 입고 머리엔 수건을 두르고, 그 위에 챙이 넓은 보릿대 모자를 쓰고 작업을 시작했다. 작렬하는 여름 태양 아래 나무 사다리에 올라가 각자 맡은 구간을 열심히 칠하느라 온 몸은 땀으로 젖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처음 해보는 페인트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지저분한 벽면이 깨끗하게 탈바꿈하는 게 신기해 힘든 줄도 모르고 신들린 듯 붓질을 해나갔다. 요즘처럼 안정적인 사다리가 아니어서 위험하기도 했는데 당시 제법 균형감이 좋을 때여서 가능했을 것이다.
옛 생각과 페인트 칠 삼매경에 빠져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니 벽면이 깨끗해졌다. 오늘 갤러리에 페인트를 칠하면서 떠올린, 대학교 1학년 때 사다리 위에 올라가 페인트칠하는 장면이 지금 내 인생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환해진 갤러리 공간을 뿌듯한 마음으로 천천히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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