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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공동기획] 천년도시 진주의 향기<5>선비정신의 표상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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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2  03: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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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 조식 영정

◇남명 조식은 누구인가

위대한 인물이 출현하는 데는 역사적 전통과 지리적 특성이 바탕이 된다. 남명 역시, 조선 초기 이후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이 형성해 온 학문적 연원과,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라는 지리적 특성 속에서 태어나 성취된 인물이다.

남명은 1501(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동(兎洞·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이름은 식(植)이다.

같은 해 같은 안동에서 태어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뛰어난 학문을 이뤄 남명학파와 퇴계학파를 형성, 한국학술사에 우뚝한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남명은 다른 선비들과는 달리, 아주 폭넓게 공부했다. 장래 세상에 크게 쓰일 것에 대비, 유교경전은 물론, 제자백가, 천문, 지리, 의학, 수학, 병법 등을 두루 공부해 안목을 넓혀 나갔다.

청년기에 수양방법 두 가지를 마련했다. 그릇에 물을 가득 담아 꿇어앉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밤을 새우며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옷 띠에 쇠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깨우치는 것이었다. 일생 동안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하다가 72세(1572년) 때 별세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문집 남명집과 독서할 때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모은 학기유편이 있다.
   
▲ 마음 수양법을 도식화한 신명사도


◇참된 선비의 길을 가다

청년기에 과거 공부를 해 가다가, 실천을 위주로 한 진정한 유학으로 복귀하는 계기를 25세 때 만났다. 원나라 학자 노재(魯齋) 허형(許衡)이 말한 참된 선비의 길에 관한 말을 접하고부터였다. 그 말을 보고 학문과 처신의 방향을 찾아 결심이 섰던 것이었다. 과거공부가 그릇됐음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유학의 정수를 공부하기에 전념해 실천 위주의 학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학문을 해 나가면서 자신의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경(敬)과 의(義)를 표방했다. 경·의는 주역의 ‘군자는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경은 마음의 주재자이고, 의는 모든 행동의 올바른 기준이 된다. 경과 의가 갖춰진 뒤에라야 마음이 맑아져서 모든 판단이 바르게 되고 참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경의를 행동화하고자 하여 남명은 자신이 차고 다니던 칼에다, ‘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명(銘)을 새겼다. 마음으로 늘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경의에 달통(達通)할 수 있을까 노력했다.

남명의 학문은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을 하였지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다. 도덕적 인격의 확실한 완성이 남명 학문의 궁극적 목표였고, 그런 바탕 위에서 세상에 쓰이고자 했는데, 바로 ‘경·의’ 두 글자에서 올바른 길을 찾았던 것이다.

 
   
 


◇벼슬 사양 열세 번

38세 때 참봉에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다시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라는 벼슬을 내려 남명을 불렀다. 주부는 종6품 자리었다. 을사사화를 일으킨 간신 윤원형 일당이 남명에게 6품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야에 묻힌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좋은 명분을 얻어 백성들의 눈과 귀를 속이기 위해서 불렀던 것이다.

남명은 결코 일신만을 깨끗하게 하며 국가와 민족, 세상을 잊은 사람은 아니었다. 끝까지 벼슬을 사양한 이유는 이러하다. 벼슬에 나가는 것은 집권 간신배들에게 어진 사람과 함께 정치한다는 명분만 줄 뿐이었다. 또 내린 벼슬이 경륜을 펼 수 있는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국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 보겠다는 의지가 없었으며 계속되는 사화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 성성자


◇온 나라를 진동시킨 단성소(丹城疏)

55세(1555년) 때 남명을 바로 인접한 고을인 단성현(산청군에 합병된 고을)의 현감에 제수했다. 벼슬을 사양해 왔던 남명도, 정치가 돼가는 꼴을 보고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드디어 입을 열어 정치의 잘못과 부조리 등을 낱낱이 지적해 준엄한 필치로 상소했다. 남명은 추호도 가차 없이 임금이나 모후인 문정왕후의 잘못을 지적했다. 이 글이 이른바 유명한 단성소(乙卯辭職疏·을묘사직소 ).

이미 산림의 처사(학덕이 높으나 벼슬에 나오지 않는 선비)로서 그 비중이 높은 남명이, 선비들의 의견과 불만을 결집해 그들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임금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당시에는 왕권은 신성불가침한 존재였으므로, 남명의 강직한 상소는 다른 벼슬아치나 선비들로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극언이었다.

남명의 상소는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에 접어들었는데, 그 원인은 관원들이 모두 파당만 짓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하기 때문이다. 둘째 왕권이 무력해 가지고서 국가의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겠느냐. 셋째 국가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려고 한다면 왕 자신이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제도나 법령 등을 개정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넷째 국왕 스스로 학문을 닦아 정치의 바른 길을 알아야지, 대비나 외척 간신들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다섯째 모든 정치적 폐단이 바로 잡힌 뒤에는 자기도 정치에 나설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갓 20세인 명종은 상소문의 내용을 채택해 정치를 쇄신하기는커녕 노발대발해 남명을 엄하게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상소로 인해 남명은 한 동안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남명의 비중은 임금도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재야 사림의 영수가 된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임금의 실정을 이 정도로 정확하고 신랄하게 지적한 상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경의검


◇실천을 강조한 학문경향

남명은 당시 퇴계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성리학 연구에 치중하는 경향에 대해서 별로 찬성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실천 위주의 학문을 강조했다. 젊은 학자들 가운데는 자기의 공부가 완전한 궤도에 들기도 전에 이론적 논쟁을 일삼기 좋아하는 경향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공소(空疏)해져 가는 당시의 학문경향을 바로잡고자 큰 영향력을 가진 퇴계에게 학풍을 바로잡아 줄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냈다. 내면에는 퇴계의 학문성향 자체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뜻이 없지 않았다. 퇴계는 편지를 받고서 당시 젊은 학자들 사이에 남명이 지적한 문제점이 없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민본사상의 선구자

남명의 몇 차례 강직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이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없었고, 또 백성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위민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던 남명은 민암부(民巖賦)를 지었다. 백성과 임금과의 관계를 물과 그 위에 떠 있는 배에 비유해, 신랄한 풍자가 담긴 명작이다. 백성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를 통치자들에게 넌지시 알리는 작용을 충분히 했다.

평소 배가 항해할 수 있게 하는 잔잔한 물이 어떤 때는 성난 파도가 되어 배를 뒤엎어버리듯이, 늘 세금을 바치고 부역에 응하고 국방의 의무를 맡아 나라를 유지하게 하는 바탕이 되는 백성들이, 때로는 임금을 내쫓고 나라를 뒤엎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체재에 순응하는 여타의 선비들로서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할 “백성들이 나라를 뒤엎을 수도 있다”라는 과감한 말을 한 것이다.



◇국방의식 고취, 의병의 정신적 원천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남명이 제자들에게 병법을 가르치고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것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제하는 데 크게 공헌을 했다. 임진왜란 때 남명 제자 가운데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제한 인물이 많았던 것은 바로 남명의 이런 발상에서 나왔던 것이다. 초야에서도 국가와 백성들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국방의식을 미리 고취시키고,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도록 했다. 후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명의 제자들 중 망우당 곽재우 등은 의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고, 약포, 정탁 등은 조정의 중신으로서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임진왜란 때 남명 문인들은 거의 대부분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망하지 않은 세 가지 원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남명 제자들의 의병활동이다. 국가운명을 미리 생각하는 남명의 정신이 아니었더라면, 왜적을 물리치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선견지명이 있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물에 의해서 국가민족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맺는 말

남명은 후세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첫째 남명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남긴 글이 적기 때문이다. 둘째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의 인물들이 몰락했다. 그 이후 남명과 남명학파에 대한 왜곡과 폄하로 학문이 후세에 계승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남명의 학문은 주자학의 범위에만 국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자학 일색이던 조선시대에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왜곡 당하고 핍박받아 왔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는 완전히 침체됐다. 최근에 와서 남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다시 활기를 뛰게 됐다.

현대인들은 과학기술의 혜택을 입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편리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정신적 방황은 더 증가됐고 사회적으로 보면 도덕적 타락과 질서의 파괴는 매우 심각하다. 거기에다 환경파괴 계층 간 갈등 등등 난제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런 때에 이를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남명의 학문과 사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명의 학문과 사상은 현대인들에게 올바른 정신적인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허권수교수

허권수

▶필자약력
경상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전 경상대 도서관장
전 남명학연구소 소장
전 우리한문학회 회장

   
▲ 남명 동상 앞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경남도교육청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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