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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6>충무공 김시민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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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8  22: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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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성을 지키고 많은 적을 막아내어 이미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충성을 다하였도다.”

국왕 선조가 ‘선무공신 김시민교서’ 서두에서 장군을 두고 한 말이다. 이 교서는 임진왜란 후 수많은 유공자의 공식적 검토와 의견 조율을 거쳐 수훈자들에게 하사한 문서의 하나이다. 남아 있는 선무공신교서가 희귀하고 진주대첩을 진두지휘한 김시민(金時敏·1554~1592)의 교서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지대하다.

임진왜란 특별전시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된 곡절한 사연이 있다. 원래 이 문서는 충북 괴산의 종가에 전해져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유출돼 한동안 그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다가 2005년 10월 일본 동경의 고미술상에서 제작한 경매도록 사진에 이 교서가 실린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다. 국립박물관에서 서둘러 매입하려고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실패하고 결국 일본인 고서적상에게 1억원 넘는 고가에 낙찰됐다.

귀중한 국가문화재를 눈앞에서 놓친 이상 언제 다시 우리 손에 들어올지 모를 일이었다. 마침 2006년 새해 벽두에 경남일보가 국내 언론 최초로 교서 발견 소식을 전하며 환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에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시민 대상으로 모금운동을 시작해 반환 운동의 불을 지폈다. 이 무렵 해외 소재 문화재 환수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MBC 프로그램 ‘느낌표’에서 7월 1일 모금 방송을 시작했다. 국민들의 뜨거운 호응과 자발적 동참으로 목표액 1억 3000만원을 단시간에 확보했다. 일본 상인과 이미 약속한 기한에 맞춰 곧장 도일해 당초 낙찰가를 훨씬 웃도는 가격을 치르고 7월 24일 고국으로 힘겹게 되찾아왔다. 이내 두 달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를 거쳐 국립진주박물관으로 이관됐고 그해 연말에 보물 제1476호로 지정됐다.

   
▲ 선무공신 김시민교서 사진제공=진주국립박물관


이 공신교서는 1604년 10월 작성된 것으로, 김시민에게 병조판서와 상락군 군호를 추증함과 아울러 선무공신 2등에 책봉한다는 내용이다. 이보다 4개월 전인 6월 25일, 임란 기간에 활약한 사람들을 공신으로 최종 확정한 바 있다. 이때 선조의 의주 피란길을 수행한 86명에게 호성공신(扈聖功臣), 실제 전투를 벌였거나 명 구원병 유치에 공이 많았던 31명에게는 선무공신(宣武功臣), 1596년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5명에게 청난공신(淸難功臣) 칭호를 각각 내리면서 세 등급으로 구분했다. 호성공신 인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선무공신 중 진주대첩의 수훈자 이광악이 3등으로 기록돼 있다.

명장 김시민은 1554년 현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마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김충갑(1515~1575)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정미사화 발단이 된 양제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21년간 청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런 영향인지 그는 1584년 무과에 급제했고, 1583년 함경도 회령지방에서 여진족 니탕개 무리가 반란하자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진주판관이 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지리산 상원동으로 일시 몸을 피했다가 곧 진주 관아로 복귀한 뒤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의병들과 합세해 진주로 향하던 왜군을 쳐부수고 남부의 여러 지역을 수복했다. 7월 26일 진주목사로 승진 발탁되자 진주에 줄곧 주둔하면서 철저한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특히 화약 150근과 총 통 170여 자루를 미리 제작해 비치하는 등 무기 체계를 정비한 점이 돋보인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향해 다시 총집결했다. 호남을 차지하려면 이곳을 놔두고 우회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반면 우리로서는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었다.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이 무너지게 되고, 호남이 무너지면 전 국토가 무너지는 목구멍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진주성이 상호 전략적 요충지가 된 만큼 치열한 대격전은 불가피했다.

당시 진주성에는 약 3800여 명의 조선군이 있었다. 성 외곽에는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 의령 의병장 곽재우, 삼가 의병장 윤탁, 합천 의병장 김준민 등이 이끄는 4~5000명의 지원군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일본군은 약 3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8대1의 수적인 열세였지만 김시민 장군이 선두에서 이끌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때 전투 상황이 김성일(1538~1593)의 진주수성승첩장에 서술돼 있다. 10월 5일 선봉에 선 왜적 기병 1000여 명이 진주성 동북 방면의 말티고개에서 작전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 김시민은 탄알 한 개나 화살 한 대라도 함부로 허비하지 않도록 지시하고 기병 500명을 뽑아 적진에 투입했다. 또 성 안에 큰 용이 그려진 깃발을 세워 전의를 굳게 불태우면서 노약자들과 여자들에게 남장을 시켜 군사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때 그들의 주력부대는 현 금산면 속사리 강변 부근의 임연대에 머물렀다.

이튿날 일본군은 세 부대로 나누어 대거 몰려왔다. 한 부대는 진주성 동문 밖 옥봉동 순천당산에 진영을 꾸려 조총을 쏘았고 다른 부대는 진주객사 봉명루 앞에 진을 쳤으며, 나머지 부대는 그 사이 지점에 대오를 갖춰 포위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수시로 성을 공격하고 민가를 불태웠으며, 동문 밖에 누대를 높이 쌓은 후 총포를 발사했다. 김시민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군사들을 통제하고 민심을 결집시켰다. 7일 왜적은 토성을 더 높이 쌓아 공격을 지속하는 한편 사방으로 흩어져 노략질을 자행했다. 다음날 왜적은 공성용 대나무 사다리를 수 천 개 만들었고 김시민은 고도의 심리전을 병행하며 진천뢰·바윗돌·가마솥을 확보해 근접 공성전에 대비했다.

일본군의 총공격은 10월 10일 새벽 포성과 더불어 일제히 맹공을 퍼부었다. 동문, 북문, 서문으로 분산해 긴사다리를 세워 공격하거나 주변 곳곳에 불을 질러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이때 경상우병사 직책을 이어받은 김시민은 북장대에서 직접 공방전을 독려하다가 동틀 무렵 시체 속에 숨어 있던 왜적이 쏜 탄환에 이마를 맞아 의식을 잃었다. 좌익장 이광악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군민들을 독전해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쏟거나 진천뢰를 터뜨려 성에 오르는 왜적을 수 없이 죽였다. 한때 구북문이 무너졌으나 전 만호 최덕량 등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물리침으로써 적들은 사기가 크게 꺾여 창원과 함양 방면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전 6일 만에 일본군 장수 3백 명, 병사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제1차 진주성전투는 우리 군사가 육지에서 거둔 첫 대승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기적 같은 진주대첩의 승인은 일사불란한 지휘체계, 신속한 무기 제작과 성벽 수축, 용의주도한 전술 구사, 사생결단의 대외 항쟁의식, 군관민의 일심동체, 천혜의 남강 절벽과 대사지 연못으로 둘러싸인 진주성의 지리 조건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전쟁영웅을 애석하게도 잃었다. 비운의 유탄에 쓰러진 김시민 장군이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11월 22일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고 만 것이다. 유해는 한 달 뒤 선영이 있던 천릿길 괴산으로 눈물 속에 운구됐다. 함양 출신의 의병장 정경운(1556~1610)의 고대일록에는 그가 진주 관아에서 서거하던 날, 진주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큰소리로 통곡하며 밤을 지새웠다고 적혀 있다.

김시민 장군의 위업은 전후 선양 작업으로 이어졌다. 공신 확정과 교서 발급을 통해 명성을 청사에 길이 전하면서 진주성에는 관련 기념물을 조성했다. 1619년 7월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성여신의 비문을 한몽삼의 글씨로 새긴 김시민장군 전공비를 세웠고, 1652년에는 충민사를 건립해 김시민 위패를 단독 봉안했다. 이 사우는 1667년 사액을 받았으나 서원 철폐 때 창렬사와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1711년에는 영의정 추증과 동시에 “내 몸이 위태로워도 위를 받드는 것이 충이요, 쳐들어오는 적의 창을 꺾어 치욕을 막는 것이 무이다.(危身奉上曰忠, 折衝禦侮曰武)”라는 의미의 ‘충무’ 시호를 내렸다. 이로써 바다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육지의 충무공 김시민 장군 두 분을 뚜렷이 기억할 수 있게 됐다.

김시민 장군 일가족은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민족 침입 때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임란 전 진주목사를 지낸 숙부 김제갑(1525~1592)은 원주목사로서 치악산 영원산성에 들어가 왜적에게 항거하다가 부인·아들과 함께 순절했는데,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 이 사실을 상세히 수록했다.

또 이복동생 김시약은 진주대첩에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창성부사 때 일어난 정묘호란의 와중에 오랑캐에게 붙잡혔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아 사지가 찢겼고, 그의 두 아들도 따라 죽었다.

1593년 6월 절치부심한 일본군의 재침략으로 삼장사를 위시한 약 6만여 군민이 진주성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때 논개는 민족적 분노를 일시에 설욕하는 의로운 순국을 결행했다. 진주성전투에서 목숨을 던진 수많은 순국지사와 민중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절의의 화신이다. 이들의 기개가 있었기에 임란 전체를 승전으로 끝낼 수 있었다.

문화적 기억이 풍부한 진주성의 여러 사적은 잘못된 과거를 성찰하고 올바른 방향성을 모색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장소이다. 촉석루와 남강 주변의 빼어난 역사 경관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북문 곁의 김시민장군 동상과 서장대 아래의 창렬사는 선인들의 혈충 정신을 깊이 되새기는 데 빠뜨릴 수 없는 필수 유적이다.

한편 국립진주박물관은 보물 제668-3호로 지정된 ‘태평회맹도’ 병풍을 소장하고 있다. 교서를 하사하던 해인 1604년 10월 27일 밤부터 28일 새벽까지 당대에 세 차례 책훈한 공신 중 생존자 63명을 초청해 베푼 축하연을 그린 것이다. 김시민은 이미 별세한 뒤라 참석할 수 없었지만 공신교서와 특별한 관계가 있으므로 주목할 만한 문화재이다.

최근 진주혁신도시에 장군의 시호를 따 충무공동을 신설했고, 이곳과 상대동을 연결하는 김시민대교도 건설했으며, 촉석루 앞의 진주대첩기념광장 완공을 앞두고 있다. 충절의 귀감인 진주목사 김시민을 기억하는 바람직한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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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강진 교수
▶필자 약력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1995~현재. 동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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