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8)
[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8)
  • 임명진
  • 승인 2018.10.19 1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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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6일차-승전보, 김시민의 비보
1)1차 진주성 전투, 그날을 만나다 ☜                 
2)유숭인 부대의 결사항전  ☜                       
3)전투1일차-탐색전, 적을 속여라 ☜                  
4)전투2일차-공성전, 왜군에 포위당한 진주성 ☜       
5)전투3일차-심리전, 포로로 잡힌 진주 아이들 ☜      
6)전투4일차-방어전, 성벽을 사수하라 ☜              
7)전투5일차-총공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         
8)전투 6일차-승전보와 김시민의 비보 ☜             
9)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                 
▲ 진주성 남측에 위치한 촉석문과 멀리 선학산이 보인다.


10일 사경(새벽 1~3시) 일본군의 본진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적들은 돌연 군막을 철거하고 우마차에 짐을 싣는 등 퇴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숨죽여 이를 지켜보던 조선군은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다.

김시민을 비롯한 장수들은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지금 당장 적을 쫓아 쳐야 합니다”.

“적의 술수가 있을 수 있으니 신중해야 합니다”

장수들의 설전이 오가는 가운데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김시민은 적의 기만전술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김시민의 판단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거짓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은 곧 야음을 틈타 두 부대로 나눠 1만여 명은 동문, 남은 부대는 구북문으로 들이닥쳤다.

적들은 대나무 사다리를 걸치고, 방패를 짊어진 자도 있었다. 향교의 제기를 떼어 붙인 자도 있었다. 짚이나 풀을 엮어 모자를 만들어 화살과 돌을 피하려는 자도 있었다.

일본군이 쏘아대는 조총 소리는 마치 우레와 같았으며 성벽마다 무수히 많은 사다리가 걸쳐졌다.

조선군은 적의 성벽 근처로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성 밖으로 비격진천뢰, 질려포를 터트리고 큰 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도 던졌다.

일본군은 마름쇠를 밟기도 하고, 활이나 돌에 맞아 쓰러졌다.

끓는 물에 머리를 데이고 이마를 그을린 자가 셀 수 없었으며, 비격진천뢰에 부딪치고 넘어져 죽는 적군도 무수히 많았다.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시한폭탄으로 이를 알 리 없던 일본군은 기이한 물건으로 여기고 매우 두려워했다.

 
▲ 임진대첩계사순의단 부조. 진주성 전투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새겼다.



치열한 공방전이 진주성벽 곳곳에서 이어졌다. 일본군도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적장들도 말을 달리고 칼을 휘두르면서 독전을 했다.

성벽을 넘은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펼쳐졌다. 처절한 사투는 끝이 날줄 몰랐다.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군사들을 독려하며 적의 침입을 막아내고 있었다.

동문의 전황이 치열해 지고 있을 때, 일본군 한 부대가 어둠을 타고 구북문 밖에 도달했다.

적의 대공세에 수비하던 조선군이 혼란에 빠지며 한때 대열이 무너졌다. 이에 만호 최득량과 군관 이눌과 윤사복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워 무너졌던 군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성 안의 노약자와 아녀자도 돌을 옮기고 물을 끓여 성벽을 올라오는 일본군에게 쏟아 부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다 보니 성 안에는 기와, 돌, 지붕의 이엉마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동녘이 조금씩 밝아올 무렵 일본군도 지쳐 조금씩 공세가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성안에 난입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던 김시민이 적이 쏜 탄에 왼쪽 이마를 맞아 쓰러졌다.

인근의 조선군이 급히 엄호에 나섰고, 곤양 군수 이광악이 곧바로 지휘권을 이어 받아 용감히 힘써 싸웠다.

그런 이광악의 눈에 쌍으로 끄는 말을 타고 독전을 하던 적장이 눈에 보였다. 이광악은 활에 시위를 매겨 적장을 향해 쏘았다.

화살은 정확히 적장에게 날아가 명중했다. 적의 장수가 쓰러지자 사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진시(오전 7시~9시), 사시(오전 9시~11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끝이 났다.

▲ 일본군의 주력 무기인 조총,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조총을 앞세운 일본군에 속절없이 밀렸다. 조선은 노획한 일본군의 조총을 분석하는 등 다방면에 걸친 노력끝에 조총을 만들어 내 사용했다.
▲ 조선군의 주력 무기인 활과 화살통. 활은 조총에 비해 사정거리가 길고 연사가 가능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숙련되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당시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이 쓴 ‘학봉집’에서는 진주성의 마지막 전투를 이렇게 기록했다.

‘싸움에서 죽은 자는 몇인지 알수 없으나, 적의 무리가 곧 끌고 가서 마을 안의 뜨거운 불덩이 속에 던졌으며 머리를 벤 수는 겨우 30여 급 뿐이오나, 적이 물러간 후에 마을 집에서 뼈를 태운 것이 곳곳에 쌓여 있었는데, 장수 왜적의 시체는 농에 넣어서 메고 갔사오며, 잡혀 갔던 사람과 소 말은 버려둔 채 도망하였사오나, 목사는 철환에 맞았사옵고 장수와 군사는 힘을 다하였나이다. 이어서 구원해 주는 군사가 없었으므로 따라가면서 다 쳐서 죽이지 못하였사오니 지극히 아프고 분하여이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총상을 입고 투병 끝에 10월18일 3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온 나라가 일본군의 총칼에 무너진 가운데, 김시민과 3800여 군사, 의병, 백성들은 진주성을 굳게 지켰다.

일본군이 전라도 내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은 이들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건대, 1차 진주성 전투는 모두 10회에 걸쳐 이뤄졌으며 조선군 800여 명, 일본군은 1만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기간 중 조선군은 단 한 번도 일본군에게 패하지 않았다.

진주성의 승리가 알려지면서 선조는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그가 죽고 나서야 전해졌다.

김시민의 사후 6년 뒤인 1604년 10월에는 그를 선무공신으로 책봉했다.


다시 돌아온 김시민선무공신교서

김시민 선무공신교서에는 선무공신 2등에 책봉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가 세운 공적, 포상 내역과 등급별 공신 명단이 기록돼 있다.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출됐다가 지난 2005년 11월 일본 도쿄의 고서적 경매에서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진주시민을 비롯한 전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마침내 2006년 7월 환수됐다. 2006년 12월 29일 보물 제1476호로 지정,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김시민선무공신교서. /자료제공=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 내 우물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이 우물은 2013년 9월에 복원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가 끝나고 일본군에 의해 모든 우물이 폐쇄됐다. 조선 후기 진주성도(국립진주박물관 보관)에는 지금 위치에 관청과 함께 세 곳에 우물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진주성을 쌓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우물로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때에는 식수공급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임명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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