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1)
[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1)
  • 임명진
  • 승인 2018.10.18 19: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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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진주성 전투, 그날을 만나다

1)1차 진주성 전투, 그날을 만나다 ☜                 
2)유숭인 부대의 결사항전  ☜                       

3)전투1일차-탐색전, 적을 속여라 ☜                  
4)전투2일차-공성전, 왜군에 포위당한 진주성 ☜       
5)전투3일차-심리전, 포로로 잡힌 진주 아이들 ☜      
6)전투4일차-방어전, 성벽을 사수하라 ☜              
7)전투5일차-총공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         
8)전투 6일차-승전보와 김시민의 비보 ☜             
9)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                 

본보 창간 109주년에 즈음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을 되짚어 본다. 왜 지금 진주성 대첩을 재조명하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고 전쟁을 준비하는 국가만이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한다. 진주성 대첩은 화석화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에게 던져진 살아있는 화두다. 진주성 대첩, 그 역사현장을 복기하며 400여년 전 선조들이 흘린 피와 땀·눈물의 의미를 다시 새긴다. /편집자 주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무진주 무호남, 無晉州 無湖南)’ 이 한마디로 진주의 전략적 가치를 설명할 수 있다. 진주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호남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은 두 차례나 진주를 공격했다. 1592년 1차 전투는 3800여 명의 조선군이 장장 6일간에 걸쳐 일본군 3만 부대를 물리쳐 대승을 거뒀고, 이듬해 2차 전투는 9일간 무려 10만의 대군을 동원한 일본과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함락됐다. 하지만 성을 함락시킨 일본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호남 진출을 포기해야 했다.

진주성 1차 전투는 폭풍우처럼 불어닥쳤다. 일본군의 총칼이 진주성으로 향한 건 1592년 10월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성일이 쓴 ‘학봉집’은 당시의 급박했던 진주성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김해에 머물러 있던 적 3만여 명은 9월24일 삼군으로 나뉘어 노현의 군을 습격하고 27일에는 또 창원부를 침범하였사온데, 병사가 두 번이나 패해 전후에 죽은 자가 무려 1400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군사들은 기운을 잃었사오며 사민(백성)은 무너져 흩어졌사옵니다.

적의 무리는 이긴 기세를 타서 그 세력이 마치 풍우(비바람) 같사와 이달 2일에는 함안을 함락하고 5일에는 선봉 왜적의 기병 1000여 명이 곧장 진주 동쪽인 마현 북쪽 봉우리에 이르러 형세를 살피고 마구 달려 군세가 요란하였습니다”

대마도를 거쳐 1592년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거듭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성 부사 송상현의 분전과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해 불과 20일 만에 서울(한양)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실상 조선은 전쟁 준비가 전혀 돼 있지 못했다.

‘나라가 태평한 지 200년이라 백성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몰랐다(선조실록)’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속절없이 밀리던 조선군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연전 연승을 거두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육지에서도 조금씩 반격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적의 배후를 교란시켰다. 이순신 장군이 제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서 일본군은 점차 보급 조달마저 어려워졌다.

그런 일본에게 호남침공은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이순신 장군의 근거지를 장악해 조선수군을 견제하겠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계략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관문인 진주성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조선 역시 진주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진주는 남쪽 지방의 거진으로 양도의 요충지에 위치하였으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적이 반드시 호남을 침범할 것입니다(학봉 김성일·선조실록)’

‘진주는 호남과 매우 가까이 있어 실로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는 형세이다. 진주가 없으면 호남도 없다(의병장 김천일)’

마침내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휘하 장수들에게 진주성 공략을 명했다. 3만의 일본군에 맞서 진주성에는 목사 김시민과 불과 3800여 명의 군사들이 배치됐다. 호남의 관문 진주성에서 마주친 양국의 군사들. 조선의 운명을 가름할 진주성 대첩, 그 처절한 1차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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