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7)
[특별기획]진주성 대첩, 다시 보는 그날(7)
  • 임명진
  • 승인 2018.10.19 1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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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5일차-총공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1)1차 진주성 전투, 그날을 만나다 ☜                 
2)유숭인 부대의 결사항전  ☜                       
3)전투1일차-탐색전, 적을 속여라 ☜                  
4)전투2일차-공성전, 왜군에 포위당한 진주성 ☜       
5)전투3일차-심리전, 포로로 잡힌 진주 아이들 ☜      
6)전투4일차-방어전, 성벽을 사수하라 ☜              
7)전투5일차-총공세,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         
8)전투 6일차-승전보와 김시민의 비보 ☜             
9)그날을 기억하며-전문가 인터뷰 ☜                 
 
▲ 진주성 북장대북장대는 일명 진남루라 부르며 내성과 외성에 포진한 성의 병력을 지휘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져 한차례의 중건을 거치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에 중수했다.

연일 계속되는 전투에 조선군도 지쳐갔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한 채 매일매일 전투에 임해야 했다.

화살과 포탄도, 심지어 돌멩이까지 떨어져 가고 있었다.

포위를 당한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전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성안의 조선군은 가까스로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서서히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김시민은 온갖 방법으로 계책을 내어 밤낮으로 성을 방어하면서 전투에 지친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애를 썼다.

 
▲ 진주성 북장대에서 바라본 진주 도심 전경. 도심의 이마트 건물을 비롯한 도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록에 의하면 지금의 진주경찰서 부근에 일제강점기 시절 메워진, 성을 방어하는 해자와 늪인 대사지가 있었다.


난중잡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시민이 군사에게 타이르기를(중략) 온 나라가 함몰되고 남은 데가 적어서 다만 이 한 성이 나라의 명맥에 관계되는데 지금 또 불리하다면 우리나라는 그만이다. 하물며 한번 패하면 성중의 수천 생명이 모조리 적 창칼의 밥이 되지 않겠는가? 온 힘을 다해서 이 죽음의 땅에서 살아날 길을 택해야 한다’

김시민의 말에 휘하 장수들과 군사들은 다시 한번 반드시 싸워 이기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자정이 지나 9일 새벽이 밝아왔다. 동이 틀 무렵 일본군 2000명이 망진산 부근으로 이동하는 광경이 포착됐다.

전날 밤에 출몰해 일본군을 놀라게 한 고성 현령 조응도와 복병장 정유경이 이끈 500여 군사를 찾기 위해서였다.

밤새 제대로 쉬지도 못한 일본군은 가는 길에 분풀이로 사방으로 흩어져 진주성 주변의 민가를 상대로 분탕질을 했다.

그러다 지금의 산청 단성가는 길에 이르러 의병부대를 만나 전투를 치렀다.

합천에서 온 김민준 부대였다. 전투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 흩어진 일본군 일부는 살천창 길로 향하다가 사천에서 올라온 정기룡, 조경형 등을 만났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들의 본진으로 물러나야 했다.

진주성 공략에 집중하고 있던 일본군은 후방에서 치고 빠지는 의병의 교란작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연구위원은 “진주성 1차 전투가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김시민 장군의 지도력도 크게 작용했지만 자발적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던 의병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신 연구위원은 “이들 의병들은 지형 지리를 잘 알아 끊임없이 후방을 교란하고 성안의 조선군과 합심하여 적을 맞아 싸웠기에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의병 부대와 잇따른 소규모 전투를 치룬 일본군은 다시 전력을 가다듬어 진주성을 향한 대대적인 공격을 다시 시작했다.

진주성을 포위하고 각종 공성무기와 조총과 활을 쏘아대며 공격하는 일본군에 맞서 성 안의 조선군은 대포와 화살로 반격했다.

일본군이 야심차게 준비한 공성무기는 대포에 맞아 부서졌다. 성을 넘으려고 걸친 사다리에는 펄펄 끓는 물이 쏟아졌다.

이러한 공세가 벌써 며칠 째 이어졌다. 성내 곳곳에 배치된 대포의 활약도 눈부셨다.

일본군의 공격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하지만 김시민은 화약을 아끼기 위해 대포의 사용을 최소화했다.

미시(오후1~3시)가 되자 복병장 정유경이 다시 군사 300명을 이끌고 진티고개와 새벼리 부근에 진을 쳤다.

정유경은 그 중 용감한 병사 20여 명을 추려 남강 건넜다. 이들은 민가를 상대로 분탕질을 하는 일본군과 대나무를 베는 작업을 하던 일단의 무리들을 쳐서 없앴다.

이걸 본 본진에 머물러 있던 일본군 200여 명이 남강을 건너 급히 쫓아왔지만 정유경 부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날이 지자 일본군의 공세도 다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일본군 진영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횃불을 들고 막사들을 서로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와중에 한 조선아이가 적진에서 도망쳐 간신히 성의 신북문 앞에 이르렀다. 포로로 잡힌 진주 아이였다.

아이를 무사히 성 안으로 들인 조선군은 적의 사정을 캐물었다.

지친 아이에게 적의 동향을 묻자, 아이가 말했다. “일본군이 내일 첫 새벽에 전력을 다해 성을 치겠다고 했습니다.”

 
▲ 진주성 성벽, 남강변에서 바라본 진주성의 성벽은 야트만한 야산에 지어져 있는데다 성 주변에는 해자와 늪이 있어 공격이 여의치 않았다.


김시민을 비롯한 휘하 장수들은 일본군이 또다시 계략을 꾸미고 있음을 알았다.

일본군도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벌써 성을 공략한지 5일이 지났고 병력 손실도 엄청났다.

도처에서 신출귀몰 활약하는 의병도 골머리였다. 성 주변에서 진주성의 조선군을 응원하는 의병의 수는 갈수록 늘었다.

각종 문헌 기록에 의하면 당시 진주성 주변에는 3000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가 산개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군은 더 이상 진주성에서 시간을 끌 수 없다고 판단, 전력을 모두 긁어모아 마지막 전투를 벌일 계획을 꾸몄다.

진주성의 운명을 결정짓는 마지막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글=임명진·그래픽=박현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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