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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 향기 <20>진주역사와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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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28  22: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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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예로부터 한반도 남쪽의 중앙에 위치하여 이 고장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역사적으로 진주의 지명이 등장하는 시기와 이 고장을 대표하는 건축물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사람들은 날씨와 지리, 먹거리 등의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가족과 사회적인 신분, 풍습 등의 인문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살기위해서는 살 집을 지어야하고 또 생활하는 장소인 건축물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는 방식이 굳어진다. 이것이 지역마다 오랜 기간 이어지게 되면 그 고장의 전통이 되고, 비슷한 환경을 갖는 이웃고장으로 넓어지면 문화권(文化圈)이라는 다소 넓은 의미의 전통을 이루게 되는 특징이 있다.

그러다 정치, 경제,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그 지역에 영향력이 큰 인물이 나타나게 되면 그 사람으로부터 또 영향을 받아 지역적으로 독특한 문화를 갖게 된다.

역사적으로 진주는 구석기 시대부터 가야시대까지 많은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사람이 많이 살았던 곳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진주의 옛 지명이 등장하는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을 아홉 개의 구역(九州)으로 나누고 청주(菁州)를 그 중 하나로 정하면서부터다.

이후에 강주(康州)로, 고려에 와서는 전국을 8개의 목(牧)으로 나누고 그중 하나인 진주목(晉州牧)의 중심지가 되면서 진주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진주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남부의 중심에 속하는 큰 고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 격에 어울리는 훌륭한 건축들이 지어졌다.

진주 지역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북(北)으로 산청군, 동(東)으로 의령군, 함안군 남(南)으로 사천시 서(西)로는 하동군으로 나누어져 둘러 싸여있지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경남 서부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 살펴보는 것보다 둘러싼 다른 여러 지역을 포함하여 진주문화권으로 살펴봐야 한다.

진주문화권은 좁게는 현재의 진주시 가운데 진주성과 외곽에 형성된 시가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넓게는 지리적으로 남해안의 중간에 위치하여 문화의 교류는 남, 동, 서쪽보다 북쪽의 영향을 받았다. 서울까지 두 곳의 교통로를 가져 역사적으로 두 문화권과 관련을 갖는다. 하나는 산청, 함양, 남원을 거쳐 전주, 대전, 서울로 가는 전라도, 충청도문화권의 영향을 받는 길이고, 또 하나는 합천, 거창, 김천, 상주, 안동, 문경새재를 거쳐 서울로 가는 경상도문화권의 영향을 받는 길이다.

진주성이 남으로 남강을 면하고 동쪽과 서쪽으로 험한 절벽을 두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요새 형태를 띠고 있어서 통일신라 이후로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큰 고장이 되었고, 고려시대 이후로 산성으로 이용되었다. 고려시대 각 고을의 성들은 대개 높지 않은 언덕에 자리 잡아 산성의 형태로 이곳에 관아를 지어 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오면서 진주성 밖에 진주목 관아가 진주 시가지의 북측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중기 이후의 진주 시가지를 묘사한 그림(《晉州城圖》)과 지도(《진양지》,《輿地圖書》)에 비봉산 자락에 동헌과 객사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와서 진주에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되면서 남강 변에 있던 진주성에서 더 넓은 평지로 수령관아와 부속건물이 옮겨지게 되고 진주성은 본래 가지고 있던 병영(慶尙道 右兵營)성의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

진주가 가진 방어에 유리한 조건이 오히려 임진왜란과 한국동란 때 전쟁의 격전지가 되어 시가지가 거의 소실되었다. 진주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아쉽게도 시가지에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건축물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진주의 건축 문화유산은 지면의 한계 상 진주성 내에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국한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진주성 내에는 성과 관련한 관아 건물들과 임진왜란에 의롭게 싸우다 목숨을 잃은 인물들을 기리는 추모 건축물들이 가득하며 이 건물들이 여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을 나타내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영향을 받아 주변까지 진주문화권을 이루기 때문이다.

*위엄과 권위를 세우다: 진주성 내의 관아 건축물 군
촉석루, 북장대, 서장대, 영남포정사, 촉석문, 공북문
   
▲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일제강점기 시절 촉석루 사진

촉석루
남강 벼랑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아 있는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 제일의 명승으로서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최초의 건립 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문헌기록 상으로 가장 이른 것은 1241년(고려 고종28) 진주 목사 김지대가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벼랑 위 경치가 좋은 곳에 세워져 공적인 집회나 중요한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격조 높게 쓰였다. 진주의 상징으로 사랑 받으며 진주를 방문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촉석루의 아름다움을 시와 글로 남겼다. 또 전쟁 때에는 지휘 본부로 사용되었다가, 평화로운 때에는 과거 시험을 치르는 시험장으로도 쓰였는데, ‘남장대’니 ‘장원루’니 하는 또 다른 이름에서도 그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여러 번 중수와 보수를 거쳐 원형을 유지해 와 1948년 국보 276호로 지정되었으나 한국동란으로 소실되었다. 1959년 국비를 들여 중건하고자 했을 때 진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고 성금을 모아 보태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 규모로 우리나라 누각 건축물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920년경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의 불타기 직전 모습과 현재를 비교하면 마루 아랫기둥이 돌로 바뀐 것 말고 거의 같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진주성도에 그려진 그림에는 촉석루에 인접하여 부속 건물이 좌우에 있고, 건물의 명칭도 여러 기록에서 동쪽에 청심헌과 함옥헌, 서쪽에 관수헌과 쌍청당이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으나 중건 당시 부속건물이 빠진 것이다. 이것은 누각이 높게 사방으로 트이고 바닥이 마루라 조망 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날씨가 궂다든 지 추운 겨울과 밤에는 쓰기가 불편하므로 따로 누워 잘 수 있는 온돌로 된 방과 같은 부속공간이 필요해서 누각 옆에 별도의 건물을 붙여 놓은 모습을 뜻한다. 보물인 영남루는 본루와 좌우에 능파당과 침류당이 나란히 배치되어 완결된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국보로 지정되었던 촉석루는 본루만 덩그렇게 짓고 중건했다 말할 수 있을까?

 
   
▲ 북장대의 정면과 측면
북장대
이 건물은 군영 건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높게 축대를 쌓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아 누각처럼 사방을 틔우고 닭 벼슬 모양의 난간을 둘렀다. 진주성의 북쪽 끝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장군의 지휘소로 성의 서쪽과 북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내성은 물론 외성에 주둔한 병사까지도 지휘할 수 있는 요새였다. 내부도 틔워 상부의 지붕 가구를 확인 할 수 있다. 상부에 5개의 도리를 놓아 지붕을 받치고, 대들보 좌우에는 충량에 용머리 조각을 붙여 비늘모양의 화려한 단청을 했다. 지붕이 부채 살 모양의 서까래와 끝에 부연을 다시 붙이고 휘어진 추녀가 날렵하게 뻗어 있어 지휘소로서의 위엄을 더하고 있다. 북장대는 후대에 세워진 군사용 지휘소 건물의 본보기가 되었다. 1584년(선조 17) 목사 신점이 세우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8년(광해군 10)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고쳐 지은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서장대의 정면과 측면
서장대
이 건물은 군영 건물인 진주성 서문의 지휘 장대로 남서쪽 끝 벼랑 위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있다.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의 지휘소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규모는 북장대와 비슷하나 단청과 장식이 소박하여 격이 낮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18년에 병마절도사 남이흥이 북장대와 같이 고쳐지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과 달리 조선후기의 전국 읍지인 《여지도서》에는 회룡루(回龍樓)라고 기록되어 있어 북장대와 같이 바닥이 마루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허물어져 있던 것을 1934년 독지가 서상필이 중건 했다 한다.

 
   
▲ 영남포정사문루 정면과 측면

영남포정사
이 건물은 남이흥이 집무하던 관덕당 앞에 드나드는 문으로 세웠다. 망미루(望美樓)라고 불리다 1896년(고종 33) 경상남도관찰사 청사의 정문이 되어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로 불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제가 1925년 경상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 역할을 했다. 규모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이층 누각으로 이층은 마루를 깔고 아래는 기둥만 세워 문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대문을 이와 같이 누각 모양으로 하는 것은 다락마루를 특별하게 쓰고자 하는 것이라기보다 대문을 높이 세워 위엄 있게 보이도록 하였기 때문에 흔히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을 두지 않는다. 영남포정사도 문루의 성격상 계단이 없고 특별한 경우에만 사다리를 놓아 오르도록 측면의 난간의 일부를 없앤 형태를 하고 있다.

   
▲ 공북문

촉석문, 공북문

촉석문은 진주성 동쪽에 자리 잡은 동문이다. 진주의 외성이 설치되면서 동문은 훨씬 밖으로 옮겨지게 되어 그 역할을 잃게 되었다.

공북문은 진주성의 북문이자 정문 노릇을 하는 문으로 쓰이고 있다. 진주성도, 여지도서 등에 공북문이 그려져 있어 17세기 말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북(拱北)이란 신하가 임금이 있는 서울인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름에 걸맞은 위엄을 갖추기 위해 성의 다른 문보다 높게 2층의 누각 형태로 구성하였다.

*국난 극복의 역사를 추모하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추모 건축물 군
창렬사, 쌍충사적비각, 촉석정충단비각, 김시민장군전공비각, 의기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


 

   
▲ 창렬사 전경 및 정면

창렬사
이 건물은 서원의 한 형태로 학생을 가르치는 강당과 기숙하는 동·서재가 없고, 선현을 모시고 제향하는 사당만 있는 형태이다.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분전했으나 순절한 인물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 건축물이다. 화곡 정사호가 건립하여 38명의 신위를 모셔 1607년(선조 40)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러다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을 모신 충민사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자 그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나머지 분들은 동서로 나누어 모셨다. 창렬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사당 영역과 관리사 영역으로 구성되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사당 세 채가 ‘ㄷ’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문 옆으로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들은 장식이 절제되어 소박하면서도 풍모가 엄숙하다.

 

   
▲ 쌍충사적비각

쌍충사적비각
이 건물은 쌍충사적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웠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모숨을 바친 제말과 조카 제홍록 두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정조임금의 명을 받아 이조판서 서유린이 글을 지어 촉석루 서편에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헐어 문산 한길에 버렸던 것을 뜻있는 마을 사람들이 보관하다 1961년 비각을 새로 짓고 비를 옮겨 왔다.

 

   
▲ 김시민장군정공비각(왼쪽)과 촉석정충단비각

촉석정충단비각과 김시민장군전공비각
최근에 조성한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앞마당에 두 개의 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물이 있다. 하나는 계사년(1593)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3장사(三壯士)’와 함께 싸우다 순절한 영령을 기리기 위해 세운 촉석정충단비이며 또 하나는 임진년(1592) 제1차 진주성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장군의 전공을 기린 김시민장군전공비이다.

 

   
▲ 의기사

의기사
이 건물은 계사년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어 함께 순절한 논개를 기린 사당이다. 의기사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규모로 아담한 이익공 맞배집이다. 사당 내부에는 위패 대신 논개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동란으로 불탄 것을 의기창렬회에서 성금을 마련하여 진주고적보존회가 재건한 것이다.

진주성은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 가운데 논개의 의로운 이야기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으로 전해온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29년(인조 7)그가 몸을 날렸다는 남강 가 바위에 ‘의암’ 두 자를 새겼고, 1722년(경종 2)에 진주 사람들이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그 뒤 1740년(영조 16)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논개의 사당을 짓고 의기사라 불렀다. 사당에는 ‘의기논개지위’라는 위패를 모셨으며, 의기사적비를 보호하는 비각을 지어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후 1823년(순조 23) 진주목사 홍백순이 봄가을에 의기사에 제향을 지내도록 하고, 1868년(고종 5)목사 정현석은 의기사를 보수하고 의암별제를 제정했다. 순절한 6월 중에 좋은 날을 잡아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마련한 뒤로 지금까지 해마다 논개의 의로움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특히 이 의암별제는 제사를 올리는 제관은 모두 여성만으로 구성하고, 음악과 노래와 춤을 바탕으로 3일 밤낮 이어지도록 꾸민 점이 각별하다. 이로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는 단순한 제례의식을 넘어 진주만의 독특한 민족예술행사가 되었다.

 

   
▲ 경절사


경절사
이 건물은 고려 초 거란에 대항하다 순절한 하공진을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적지만 진주성에 모셔진 인물들과 같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로 기리기 위해 진주성 안에 모셨다. 1804년(고종 5) 수곡면 사곡리에 낙수암을 지어 모셨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제사를 올리지 못하게 되어 1992년 진주성 안에 모시고 경절사로 고쳤다. 후손 하우가 지은 〈경절사상량문〉과 하용환이 지은 〈경절사우개기문〉에 하공진의 충절과 사당을 짓게 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삶의 가치를 가르치고 본받는 건축물로 제향과 교육을 위한 진주 향교와 서원건축물인 도천서원, 산천재, 남악서원, 대각서원, 운강서원, 광제서원, 용강서당, 청계서원 등이 있으며, 종교적 염원을 위한 건축물로 불교사찰인 청곡사, 옥천사, 응석사, 의곡사, 호국사, 영화사, 두방사, 성전암, 용산사 등이 있다.

자연에서 마음을 닦기 위한 건축물인 누각과 정자로 비봉루, 고산정, 우곡정, 부사정이 있으며, 살림집으로 마진리 이씨 옛집, 청원리 이세후 종가, 청원리 이씨 옛집, 평촌리 한씨 옛집, 단목리 김갑이씨 옛집이 있다.

또 많은 문중이 진주를 중심으로 동족마을을 구성하고 있으며, 각 문중에는 이름난 유학자와 충신, 효자, 열려들을 기리는 건물들로 종가의 부조묘와 정려각 등으로 봉산사, 도통사, 충의사, 동산재, 김해 김씨 비각, 진주 강씨 정려각, 재령이씨 열녀각, 삼효각, 증 형조판서김준민신도비각 등이 있다.

경상대학교 건축학과 고영훈 교수

고영훈
▶필자약력
경상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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